[뉴욕다이어리]트럼프 헌정용 美타임지 표지

뉴욕=조슬기나 2023. 4. 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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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미국 일상 속 이야기들을 전합니다

'전례가 없는(unprecedented).'

지난 5일(현지시간) 공개된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의 표지는 단연코 '트럼프 헌정용'이라 할 수 있겠다. 검은 바탕에 뚜렷하게 찍힌 주황색 지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치 작은 입을 벌린 채 고함을 지르고 있는 듯하다. 이는 즉각 지난 4일 뉴욕 맨해튼 형사법원에 출석해 '미 역사상 최초로 기소된 전직 대통령'으로서 지문 채취 절차를 밟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떠올리게 한다.

표지에 적힌 'unprecedented'는 지난주 현지 언론들로부터 '입막음 돈(hush money)','포르노스타(porn star)', 기소(indicted), '2024년 대선(2024 presidential race)' 등과 함께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 중 하나일 것이다. 과연 어떤 단어가 이 단어만큼 지난주 미국의 상황을 잘 축약할 수 있을까. 타임지의 이번 표지는 온라인에 공개된 지 12시간도 채 안 돼 트위터에서만 조회수 110만건을 돌파하는 등 화제를 모으고 있다. 누군가는 '최고다'라고 외치고 누군가는 '정치적 보복'이라고 반박한다. 이번 사태를 둘러싼 미국 내 관심, 정치 성향에 따른 분열을 고스란히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미지출처=미 시사주간지 타임]

1923년 창간된 타임의 표지는 표지 이미지 그 자체만으로도 늘상 뉴스가 되곤 한다. 그만큼 상징성도, 영향력도, 주목도도 높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타임지 표지의 주인공이 된 것은 꽤 오랜만이다. 전임 대통령이자, 스캔들메이커인 그는 한때 단골 중 단골이었다. 임기 중인 2018년에는 그가 직접 타임지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이번 주에 또 내가 표지에 나오냐. 내 표지가 너무 많다"고 말했다는 CNN 보도가 나왔을 정도였다. 타임지는 그가 퇴임한 2021년1월 "트럼프 전 대통령이 타임 표지 35장으로 임기를 마쳤다"고 밝혔다.

최근 몇 년간 타임지의 표지 데이터베이스를 살펴본 결과, 트럼프 전 대통령의 등장이 잦아진 것은 대선 캠페인이 본격화한 2016년부터다. 대선에 가까워질수록, 그를 둘러싼 스캔들이 들끓을수록, 때로는 일러스트레이션, 때로는 사진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대통령 당선 직후에는 '올해의 인물'도 장식했다. 표지 하단에는 '분열된 미국의 대통령'이라는 문구가 담겼다.

[이미지출처=미 시사주간지 타임]

미국인들 사이에서 가장 유명세를 모은 '트럼프 표지'로는 2018년7월2일자가 손꼽힌다. 수색당하는 어머니와 분리돼 겁에 질린 채 울고 있는 어린 소녀 앞에 트럼프 전 대통령이 서 있다. 소녀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그의 모습 옆에는 '미국에 온 것을 환영해(Welcome to America)'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당시 무관용 국경정책을 비판한 표지다.

사상 첫 '3부작 표지'로 화제를 모은 팀 오브라이언의 작품들도 대표적인 '트럼프 풍자 표지'다. 취임 직후인 2017년2월, 집무실 책상 앞에 앉은 트럼프 전 대통령은 폭풍우를 맞고 있다. 전직 포르노 배우 스토미 대니얼스의 성추문 입막음 의혹이 불거진 2018년3월에는 여전히 폭풍우가 그치지 않으며 집무실 절반이 물에 잠겨 있다. 여기에 정점을 찍은 게 2020년9월, 3부작 마지막 표지다. 트럼프 전 대통령으로 추정되는, 붉은 넥타이를 맨 남성은 물에 잠긴 집무실에서 떠올라 밖으로 머리만 뺀 채 허우적거리고 있다.

이밖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트럼프 전 대통령의 얼굴이 합성된 이른바 '트럼푸(트럼프+푸틴)' 표지, 녹아내린 듯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캐릭터 이미지 표지 ,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둥둥 뜬 바다에서 헤엄쳐 백악관으로 이동하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뒷모습을 그린 표지 등도 화제를 모았다. 이만한 인기면 한때 '가짜 타임지 표지'를 만들어 전시했다가 타임지측으로부터 철거 요청을 받아야만 했던 과거 굴욕을 덮을만하지 않는가. 물론 그 내용만은 마음에 찰 리 없겠지만 말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표지 등장은 앞으로도 이어질 전망이다. 사상 첫 전직 대통령 기소라는 이번 사태는 2024년 대선을 앞두고 정국을 뒤흔드는 소재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특히 이번 기소는 트럼프 전 대통령을 둘러싼 사법 리스크의 서막일 뿐이라는 분석도 쏟아진다. 당장 2020년 대선 이후 트럼프 전 대통령이 조지아주 국무장관에게 선거 결과를 뒤집으라고 종용했다는 의혹에 대한 기소 여부가 조만간 결정날 것으로 보인다. 백악관 기밀자료 무단 반출, 2021년 1·6 의회 폭동 사태 선동과 관련 수사도 진행 중이다. 앞으로 쏟아질 수많은 트럼프 표지 중 그 어느 것도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흡족할 것은 없어 보인다.

뉴욕=조슬기나 특파원 seul@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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