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69시간도 부러워요...저는 오늘도 자정에 퇴근합니다 [오늘도 출근, K직딩 이야기]

반진욱 매경이코노미 기자(halfnuk@mk.co.kr) 2023. 4. 8.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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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괄임금제, 공짜 야근 등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근로시간 개혁이 무의미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진은 야근하는 직장인. (연합뉴스)
# 서울 강남의 IT 기업에 다니는 5년 차 대리 A씨는 ‘주 69시간제 논란’이 부럽기만 하다. 본인에게는 60시간은커녕 ‘69시간’도 언감생심이기 때문이다. 올해 들어 소속 팀 직원 4명이 퇴사하면서, 부서의 모든 일이 A씨에게 몰렸다. 일이 몰리다 보니 ‘정시 퇴근’은 꿈꾸기도 힘들다. 야근은 기본, 주말에도 일하기 일쑤다. 수당도 제대로 받지 못한다. A씨 직장이 ‘포괄임금제’를 적용한 직장이기 때문이다. 이미 수당이 다 연봉에 포함돼 있다는 논리에 막혔다. 제대로 된 대가도 받지 못한 채 극한의 노동에 시달리는 A씨는 퇴사를 준비하고 있다.

# 공무원인 B씨는 퇴근하면 ‘일거리’를 들고 집에 온다. 주 52시간제 때문에 회사에서는 컴퓨터가 꺼져 일을 할 수 없어서다. 일할 시간은 줄었는데, 업무량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결국 집에 업무용 서류를 들고 퇴근한다. 집에서 일을 마저 처리한다. 과거에는 노동 시간이 더 인정됐기 때문에 수당이라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일은 그대로인데 오히려 받는 돈만 줄었다. B씨는 “차라리 노동 인정 시간을 늘려, 돈이라도 좀 더 받게 해줬으면 좋겠다”고 심정을 토로했다.

공짜 노동·야근 부르는 포괄임금제 있는 한 ‘주 ○○시간’ 의미 없어
주 69시간제 논란이 가열되는 와중에, 직장인들은 ‘현실’을 반영한 제도를 만들라고 목소리를 높인다.현실이 근로자의 휴식을 제대로 보장하지 못하는 탓이다. 공짜 야근을 합리화시키는 포괄임금제, 비정상적인 업무량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근무시간을 조절하는 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주장이다.

포괄임금은 근로시간 측정이 곤란한 경우 노사 약정을 통해 각종 수당과 기본급을 합해 미리 정한 액수만큼 임금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근로기준법에 없는 계약 형태다. 우리나라 법원은 ▲근로시간 산정이 어렵고 ▲근로기준법에 견줘 노동자에게 불이익하지 않을 경우 등에만 포괄임금 지급이 정당하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정당하지 않은 포괄임금 활용이 만연한 게 현실이다.

특히 이번 유연근무제 논란이 촉발된 IT·게임업계에서 포괄임금제 오남용이 만연한 것으로 나타났다.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수도권지부 IT위원회가 지난 한 달간 IT·게임업계 회사 111곳의 실태를 조사한 결과 84곳(76%)이 포괄임금제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84곳 중 74곳(88%)의 근로자들은 자신이 속한 사업장에 장시간 노동이 만연해 있다고 응답했다.

설문에 응한 근로자들은 ‘포괄임금제가 인력 자유 이용권처럼 악용돼 야근을 당연시하는 풍토가 있다’고 증언했다. 포괄임금제도를 개편하지 않는 한, 주 69시간·52시간 등 시간을 정하는 제도는 의미가 없다는 비판이 나온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도 “포괄임금 오남용 근절은 현시점에서 가장 확실한 근로시간 단축 기제”라며 “오남용을 반드시 근절해야 한다”고 여러 번 강조한 바 있다.

너무 많은 업무량도 발목, 오히려 돈만 못 받는 꼴
직장인에게 과도하게 몰리는 업무량을 줄이지 못하면, 근무시간 제한이 오히려 돈도 못 받게 하는 ‘악법’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지적 역시 만만찮다.

실제로, 업무량이 많은 탓에 직장인들은 주어진 휴식 시간도 다 못쓰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22년 전국 일-생활 균형 실태조사’에 따르면 임금 근로자 중 연차 휴가가 정해진 경우 연차 일수(2021년 기준)는 평균 17.03일이었다. 이 중 직장인들이 실제로 사용한 연차 휴가 일수는 11.63일로 사용 가능 연차와 5일 넘게 차이가 났다. 입사 후 시간이 지나면서 연차 휴가 일수가 늘어나는 경우가 많지만, 연령대에 따른 휴가 사용 일수 차이는 거의 없었다. 취업 근로자 대부분은 연차 휴가를 부여받고 있었지만 468명은 따로 정해진 연차 휴가가 없었다. 이 경우 연평균 3.13일만 휴가를 사용했다.

연차휴가를 다 쓰지 못한 이유는 ‘대체인력 부족(18.3%)’ ‘업무량 과다(17.6%)’ ‘상사 눈치(11.4%)’ ‘조직 분위기(5.1%)’ 등 ‘타의’로 아닌 경우가 과반수를 차지했다. 정부가 ‘장기 휴가’ 등 유연근무제를 도입해봤자 제대로 사용하기 힘들 것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단, 중소기업을 비롯한 경영계는 근로 유연화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중소기업계는 “일시적인 업무량 증가에 합법적으로 대처하려면 근로시간 유연화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김기문 중기중앙회장은 “소모적 논쟁보다는 근로시간 유연화가 절실히 필요한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될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를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근로시간 개편이 노사 자율 선택을 존중하고 근로자 건강권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이뤄지길 기대한다. 중소기업계도 국민 우려를 불식하기 위해 불합리하고 낡은 근로 관행을 적극 계도해나가겠다”고 밝혔다.

재계 관계자는 “기업의 근무 현실, 노동자들의 건강권·휴식권 문제 등을 면밀히 살핀 후 부족한 점을 보완하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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