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영어 내신은 25년 전과 변한 게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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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제원 기자]
벚꽃이 피고 지고, 연둣빛 잎사귀가 돋아나는 해사한 봄을 지내고 있다. 만물이 제 색을 입는 4월, 겨우내 무채색이던 세상은 색을 입는데 중간고사를 앞둔 학생들은 약속이나 한듯 무채색으로 통일되고 있다. 같은 옷을 입고 비슷한 검은 가방을 메고 다니는 아이들, 커다란 가방엔 뭐가 그리 잔뜩 들었을까.
알록달록 왁자지껄한 여덟 살, 여섯 살 형제를 키우는 내가 한 달 동안 중학생 중간고사 대비 보조 선생님으로 근처 학원에 파트 알바를 나가게 되었다. 결혼 전에 일했던 학원인데 아이들도 어느 정도 컸겠다 몸이 들썩들썩 하는 나를 파트로라도 불러 주시니 감사한 일이다.
덕분에 일주일에 몇 번은 시어머니께 아이들을 맡기고 룰루랄라 홀몸으로 나간다. 오랜만에 수업을 하는 것이 힘들지 않냐 하지만, 아니요, 집에 있는 것보다 안 힘들어요라고 호호 웃으며. 그래도 애들이 아직 어리니 남편은 내가 일을 하러 가는 날엔 칼퇴근을 할 수 있도록(조퇴도 아니고, 칼퇴근이다) 회사에 양해를 구하는 촌극이 벌어진 것이 씁쓸하다.
나는 영어학원 강사다. 학원에서는 4월 말, 5월 초에 치러지는 중간고사 대비가 이미 시작 되었다. 영어과목의 내신대비 과정은 일단 단어를 암기하고, 대화문을 암기하고, 본문을 암기하고, 문법 다지기 문제를 풀어 본 뒤 기출 문제를 계속 계속 풀며 오답정리를 해 나가는 것으로 진행이 된다.
중학교 교과서는 어릴 때부터 영어학원을 다닌 아이들에겐 어려운 수준은 아니지만 교과서가 시험 문제가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아이들 수준은 전반적으로 높아졌는데 교과서 난이도는 큰 변화가 없으니 평가는 해야 하는데 변별력을 주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학교마다 다르지만 외부 지문을 추가 하기도 하고, 꼼꼼하고 까다로운 문법 문제를 킬러 문항으로 두어 점수를 가르기도 한다. 선생님의 입장에서 보자면 난이도는 높지 않은 지문이지만 시험지 곳곳이 함정으로 지뢰밭인 상황, 어렵진 않지만 만만히 보았다간 고득점을 받기는 힘든 상황이다.
▲ 영문법 영문법 |
ⓒ 한제원 |
예를 들면 다섯 개의 선다 문항 각각에 쓰인 That이 접속사인지, 관계대명사인지, 지시 대명사인지 구별해야 하는 문제라든지, What의 쓰임이 의문사인지, 선행사를 포함하는 관계대명사인지를 구별하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영어를 재미있게, 소위 말하는 스피킹 위주로, 거부감 없이 접하도록 온갖 컬러풀한 컨텐츠를 경험한 아이들인데도 중학 내신을 맞닥뜨리면 이렇게 된다.
이 ing 들이 현재 분사인지 동명사인지, 목적격 보어로 쓰였는지 주어로 쓰였는지, 전치사의 목적어로 쓰였는지 말만 들어도 머리 아픈 문장 분석을 해내야 하는 K-영어의 세계로 들어오는 것이다.
▲ 영문법 어찌나 한결같은지 |
ⓒ 한제원 |
which는 되지만 that 은 안 된다는 콤마를 쓰고 이어주는 관계 대명사의 계속적 용법 앞에서는 영어에 뛰어난 감과 능력이 있는 아이들도, 심지어 미국에서 살다 온 아이들도 이런 K-영어 앞에서는 장사가 없다. 고작 중학 내신 시험에서 성에 차지 않는 점수를 받아들긴 원치 않으니 뭔가 옳지 않은 것 같아도 어쩔 수 없이 달달 외워야 하고 공부해야 하는 것이 학교 시험 공부이다.
가장 어렵고도 애매한 것이 서술형 부분인데 나 학교 다닐 때만 해도 큰 줄기의 흐름을 맞추면 되는 주관식 시험이 이젠 자그마한 실수에도 1점씩 빠지는 논술형이 되어버려 감점의 여지가 없도록 달달 외우게 하고 있다. 그렇게 모범 답안으로 평준화 되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썩 좋지가 않다.
내가 한창 현직에서 일할 때는 열정이 넘치는 열혈 강사여서 주말에도 나와라, 학원에 일찍 왔다가 늦게 가라, 이번 시험 백 점 한 번 맞아 보자 하며 아이들을 들들 볶아가며 독려하여 고득점을 끌어냈었다.
부모님이 나를 믿어 적지 않은 돈을 내며 학원에 보내는 아이들이고, 어릴 때부터 봐 온 아이들이니 책임감을 넘어서는 사명감으로 아이들의 학교 시험을 함께 준비했다. 고득점 결과를 받아 들고 뿌듯한 마음, 열심히 영어 공부 해 본 경험, 노력해서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어 본 경험으로 앞으로 닥쳐올 수많은 시험과 난관을 헤쳐나갈 힘을 얻길 바랐다.
지금도 그 마음은 마찬가지이다. 하기 싫은 것을 참고 해낸 경험은 하고 싶은 것을 해 낼 수 있는 힘이 될 것임을 알기에 늦은 시간까지 학원에 나와 공부하는 아이들이 오랜만에 봐도 기특하다.
다만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된 후 만난 아이들이라 그런지, 너희들 저녁은 먹었니, 잠은 몇 시간이나 잤니, 하고 물어보게 된다. 학교 끝나고 바로 학원을 도는 아이들은 대부분 편의점에서 사 먹는 간식이 저녁이거나, 아니면 커피 전문점의 커다란 음료, 엄청난 칼로리의 음료 한 잔과 깨작이는 쿠키 같은 것들이 저녁이다.
온갖 유기농에 천연 조미료로 된 이유식과 유아식을 먹으며 자란 아이들일 텐데, 엄청 매운 컵라면을 먹고 엄청 단 음료로 속을 달래는 아이들을 보자니 안타깝다. 예전엔 아이들의 식사나 생활엔 큰 관심이 없었는데 확실히 애를 낳아 키운 엄마가 되고 나니 공부만큼 신경 쓰이는 것이 먹고 자는 것이다. 내 자식이나 남의 자식이나 마찬가지로.
주말을 맞으면 학원 숙제는 배로 많아 진다. 학원마다 숙제가 많아지니, 학원을 두세 개씩 다니는 아이들은 아마 숙제에 파묻힐 것이다. 마음 속으로는 이번 주말엔 친구와 손 잡고, 아니면 더 크기 전에 부모님과 한 번 더 꽃 구경을 가 보라고, 공원에 나가 피고 지는 꽃잎과 새로 돋는 연두색 나뭇잎을 보라고, 꼭 너희들 같다고 말한다.
아직 피어 있는 꽃들과 꽃이 떨어진 자리에 새로 난 나뭇잎, 그런 나무들이 어우러진 공원, 핑크색, 노란색, 하얀색, 연두색이 꼭 너희들 같이 예쁘다고 생각하며 나도 숙제를 내 주었다. 그게 원장님과 학부모들이 나에게 맡긴 일이라 어쩔 수가 없다는 핑계로 말이다.
이렇게 어릴 때부터 영어 학원을 다니며 원어민 선생님과 틀려도 상관없이 영어로 재잘거렸을 아이들은 중2병을 맞고, K-영어 내신 공부를 하며 입을 다문다. 알록달록 하던 아이들의 색깔은 커다란 검은색 가방으로, 검은색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통일이 되는데 이것을 성장의 과정이라 봐도 될까.
나는 아이들을 성장 시키는 선생님일까, 아닐까. 아이들에겐 젊은 선생님의 열정이 좋을까 아줌마 선생님의 마음이 좋을까 생각을 하는 나는 단기 파트 알바 선생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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