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는 모두에게 안전한 곳이어야 한다
[유정희]
이 사회에서, 노동 현장에서 기대하는 몸과 노동은, 잘 '기능'할 수 있는(있다고 여겨지는) '건강한' 신체를 요구한다. 여기서 건강한 신체란 장애가 없고 충분한 이윤을 낼 만큼 빠른 속도로 일할 수 있는 몸과 마음을 얘기한다. 이때 '손상'되어 약해진 몸을 지닌 개인, 장애인, 여성, 혹은 다른 몸을 가진 소수자들은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여겨지며, 노동할 수 없는 몸으로 취급된다. 그리고 언제든 노동에서 배제될 수 있는 가치 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
자본주의 사회는 노동자가 이윤을 낼 때만 가치 있다고 보고 임금이란 '대가'를 지급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돌봄 노동이나 장애인의 노동은 가치 없는 것이 되어 대가가 지급되지 않거나 대가를 요구할 수도 없는 처지가 된다. 그렇게 이윤 창출 유무만을 따지고 판단할 때 돌봄 노동, 가사 노동 등 많은 노동이 인정되지 못하고 주변화되었다는 문제 제기는 지속되어왔다.
우리는 노동에 대해 사회적으로 가치가 있는가, 즉 '사회 구성원의 물질적·정신적·정서적 삶에 대해 기여'했는가를 보고 이에 대한 대가 지급을 이야기 해야 한다. 더 많은 노동자, 더 많은 노동이 노동자로, 노동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말이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를 비롯한 많은 사람은 출근길 지하철 타기를 포함한 많은 투쟁을 통해 장애인의 이동권, 노동권, 교육권, 탈시설을 요구해왔다. 또한 이들 권리의 실질적 시행을 위해 충분한 양의 장애인 권리예산 확보도 주장해왔다. 장애인이 시설에서 나와 대중교통으로 이동하고 교육받고 노동하며, 지역사회에서 함께 생활하는 것은 주체적인 시민이 누릴 권리라는 것을 온몸으로 외치고 있는 것이다.
▲ 장애운동은 장애인들이 지역사회에서 살고, 이동하고, 교육받고, 노동하는 것은 사회 주체가 누릴 권리임을 주장해왔다. |
ⓒ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
장애, 그리고 배제되는 장애인의 노동
비장애인을 중심으로 구성된 사회에서, 장애인이 거리에 나오고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갖추어야 할 설비는 '추가적'인 것이 되고, 또 다른 '비용'이 드는 것으로 여겨진다. 장애인의 노동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의 노동은, 노동을 할 수 없는 이들이 노동하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된다. 장애인이라서 노동을 못 하는 것일까? 헌법에서 보장하는 일할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 사회가 그만큼 장애인을 배제하기 때문에 노동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장애인의 노동할 권리가 보장되지 않은 현실에서 경제 활동이 어려운 장애인 다수는 빈곤한 상황에 놓여있다. 2022년 상반기 기준 경증장애인과 중증장애인의 고용률은 각각 43.1%, 21.2%(전체 국민 고용률 63.0%), 실업률은 각각 3.8%, 7.6%(전체 국민 실업률 3.0%), 비경제활동인구비율은 55.2%, 77.1%(전체 국민 비경제활동인구비율 2022년 하반기 기준 35.9%)다.
20여 년 전인 2002년, 최옥란 열사가 장애인으로 기초생활수급자로 빈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 세상을 떠났지만, 여전히 장애인들의 빈곤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장애인이니 당연히 경제적 약자로 사는 것이 맞을까? 특히 중증장애인의 경우 비경제활동인구비율이 매우 높다.
장애 운동의 오랜 투쟁 끝에 그나마 몇 년 전 시작한 지자체별 권리중심 공공일자리가 장애인을 권리 생산의 주체로 하여 권익옹호, 문화예술, 장애인식개선교육 등 세 가지 직무를 맡고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법제화까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장애인은 노동할 수 없는 몸이라고, 노동으로 가치를 창출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 규정하는, 이윤과 속도 중심의 사회에서 장애인에게 비장애인보다 낮은 임금을 지급하는 것 역시 당연하다 여겨왔다. 그 단적인 예시로 최저임금법을 들 수 있다. 해당 법 제7조 제1호는 '정신장애나 신체장애로 근로 능력이 현저히 낮은 사람'에게는 최저임금을 지급하지 아니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이들에게 지급해야 하는 임금의 하한선조차 없다.
우리는 '근로 능력이 현저히' 낮다는, 비장애인에 맞춘 기준이 적절한지 다시 물어야 한다. 노동의 개념을 비장애인에 맞춘 현실을 바꾸고, 비장애인의 몸만을 '정상'이라고 여기고 장애인이 노동할 수 없는 몸, 가치 없는 몸이 아니라는 인식을 바꿔,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활동할 수 있다는 다른 노동 기준을 세워야 한다.
장애인의 위험 노동 현장
그렇다면 일을 하는 장애인들의 노동 조건, 노동 현장은 어떨까? 과연 이들이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이 형성되어 있을까? 장애인들은 노동 시장에 유입되기 어려운 것처럼, 어렵게 유입된다고 하더라도 열악하고 위험이 도사리는 곳에 방치되어 일하고 있다.
1년에 업무상 재해로 2천 명씩 사망하는 한국에서 어느 현장이든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더욱이 장애인에 맞춘 노동 현장은 있지도 않다. 2019년 전남 여수의 한 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일하던 20대 설요한씨는 실적 채우기에 시달리고 괴로워하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또 다른 장애인 노동자였던 20대 김재순씨는, 2020년 재활용업체에서 제대로 된 안전장치 없이 일하다가 합성수지 파쇄기에 끼어 사망했다. 해당 작업장은 안전 장비가 설치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2인 1조의 원칙조차 지켜지지 않았다.
오직 컨베이어 속도에 맞추듯, 노동자 안전에 대한 고려 없이 공장을 가동하고 이윤을 내세우며 거기 적응하지 못하는 노동자를 밀어내는 것이 현 사회다. 이런 사회에서는 건강하던 노동자 역시 병 들고 과로사 등으로 노동을 떠날 수밖에 없다.
사회가 비장애인만을 일할 수 있는 몸으로 여기고 구분하고 분리하는 한편, 장애인의 일터건 비장애인의 일터건 노동자 몸을 중심에 두지 않은 현장인 것은 마찬가지다. 이런 현장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노동안전보건운동과 장애운동
1996년 미국의 유명 애니메이션 '심슨가족' 인형을 만들던 태국의 한 공장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그런데 공장의 사업주는 노동자들이 인형을 훔쳐 가는 것을 막겠다며 공장을 밖에서 잠가버렸고, 그 때문에 노동자들은 화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188명이 사망에 이르고 말았다.
노동자의 생명보다 이윤을 중시해 발생한 재해였다. 그 해 4월 28일, 국제 노동 단체들이 모여 산재사망 노동자를 추모하는 행사를 했고, 이후 각국에서 매년 4월 28일 산재사망 노동자를 추모하고 있다.
우리는 산재로 사망한 노동자들을 추모하며 많은 노동 현장에서 사고와 질병을 겪는 노동자에게 치료와 재활, 직장 복귀가 가능하도록 요구했다. 곳곳에 있는 유해 물질을 비롯한 위험 요소, 괴롭힘, 과로와 불규칙 노동을 없애고 예방하기 위해 싸워왔다.
우리가 만들어야 할 안전한 일터란 '건강한' 비장애인만을 상정한 조건이 아니다. 다양한 몸, 다양한 건강 상태의 노동자들이 일한다는 전제 하에, 노동자가 '실수'를 하더라도 크게 다치거나 질병으로 이어지지 않는 환경이어야 한다. 노동자의 상태에 맞게 노동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져야 한다.
여기에 '건강'의 개념 역시 확장되어, 현재 자본이 원하는 속도를 감당할 수 있는 몸만을 건강한 상태로 여기지 않고, 또 아픈 노동자라면 충분히 치료받고 쉴 권리도 보장받아야 한다. 건강하지 않은 사람도 노동을 할 수 있는 권리 및 환경 역시 보장되어야 한다. 이런 조건이 갖추어진다면, 또 산재 이후 치료, 재활 및 직장 복귀까지 원활히 이뤄지는 사회라면 비장애인 노동자들도, 장애인 노동자들도 각자의 건강을 지키며 일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비장애인 노동자들에 있어, 업무상 재해로 인해 몸의 회복이 어려워지거나 장애가 남았다면 그것은 비극이 된다. 현장의 위험 요소를 사전에 발견하여 노동재해로 가는 것을 예방하는 것과 함께, 아파도 그 몸에 맞춰 천천히 일해도 되는 일터를 상상해보자. 또한 어떤 '손상'이 생겨도, 여러 사회적인 조건이 충분히 잘 갖춰져 있어 삶을 영위하는 데에 크게 무리가 없다면, 다른 몸과의 구분 짓기를 멈출 수 있을 것이다.
장애란 고정 불변한 것이 아니고, 장애인의 몸과 비장애인의 몸이 선 하나로 분명하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회적 조건들이 장애를 구성한다는 장애의 사회적 모델을 구현해보자. 장애 있는 몸이 사회에서 탈락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현실을 바꿀 때다.
노동안전보건운동은 오랜 세월 '이윤보다 생명'을 중시하는 노동 현장을 만들기 위해 싸워왔다. 자본의 속도가 아니라 노동자의 몸에 맞는 일터를 만들기 위해 투쟁했다. 장애 운동은 장애인의 교육받고 이동하고 노동할 권리를 부수적인 것으로 여기는 사회에서 온몸을 던져 싸워왔다. 자본이 아닌 인간의 몸, 다양한 몸에 노동 현장을 맞추기 위한 투쟁으로, 두 운동이 더욱 긴밀히 만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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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유청희 님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입니다. 이 글은 한노보연 월간지 일터 23년 4월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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