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숭이들의 놀이터가 된 스님들의 수행 공간 [가자, 서쪽으로]
[김찬호 기자]
바라나시에 며칠을 머물고, 밤 기차에 올라탑니다. 기차가 향하는 곳은 마디야프라데쉬 주의 주도인 보팔입니다. 사실 보팔에 들르게 되면 이동 거리가 한참 늘어나는 상황이었습니다. 인도 일정을 많이 줄인다고 줄였는데도, 보팔을 뺄 수는 없었습니다. 산치의 스투파만큼은 꼭 보고 싶었거든요.
▲ 산치 역 |
ⓒ Widerstand |
기원전 5세기에는 페르시아가 인도 북서부에 진출합니다. 기원전 3세기에는 알렉산더의 마케도니아 왕국이 인도와 접경했죠.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문화는 남아시아 문명에 새로운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 이후 탄생한 최초의 중앙집권적 통일 왕조가 바로 마우리아 왕조입니다.
마우리아 왕조는 기원전 4세기에서 2세기경 찬드라굽타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손자인 아쇼카 왕의 이름이 더 익숙하죠. 아쇼카는 마우리아 왕조의 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영국령 인도 제국 이전에는 유일하게 남북 인도를 모두 통일한 국가로 칭해지기도 합니다. 물론 고대국가의 지배와 통일이라는 것은 근대국가의 방식과는 분명히 다르지만요.
▲ 산치에 남은 아쇼카 석주의 흔적 |
ⓒ Widerstand |
그 흔적이 남은 것이 아쇼카 시대의 석주입니다. 아쇼카 왕은 인도 아대륙 전반에 돌로 기둥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석주에 고대 산스크리트어나 일부 그리스어, 아람어(Aramaic) 등으로 포고문을 새겼죠. 국가 정책에 관한 내용도 있고, 살생을 제한하는 등 불교적인 내용도 있습니다.
▲ 산치 1번 스투파 |
ⓒ Widerstand |
물론 산치의 스투파도 여러 고초를 겪었습니다. 아쇼카 왕은 50여 년을 집권한 뒤 사망했습니다. 긴 집권기간 탓에 이미 아들들은 사망하거나 승려가 되었고, 그 손자가 왕위를 이었죠. 하지만 이후 각종 반란과 지방 정권의 성장이 이어집니다.
▲ 산치 승원의 흔적 |
ⓒ Widerstand |
산치 유적의 중앙에 위치한 스투파는 지금 봐도 거대합니다. 탑의 가장 위에는 존귀한 사람을 나타내는 양산(Chatra) 모양이 올라가 있죠. 이 형태가 확장되고, 후일 동아시아의 목조 건물 양식과 만나며 지금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탑의 모습이 만들어졌다고도 합니다.
▲ 산치 스투파의 토라나 |
ⓒ Widerstand |
하지만 이 많은 도상을 아무리 살펴봐도 부처님의 모습은 없습니다. 당시에는 부처의 모습을 표현하지 않았거든요. 미술사에서는 이것을 '무불상 시대'라고 부릅니다. 존귀한 사람은 오히려 형상으로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림에서는 존귀한 사람을 나타내는 양산이나 발자국, 보리수 나무의 모습으로 그 자리만을 표시합니다.
▲ 부처의 자리에 표현된 법륜 |
ⓒ Widerstand |
쿠샨 왕조는 헬레니즘 문화권을 비롯해 다른 문화권과 적극적으로 교류했습니다. 이들이 곧 불교를 받아들였고, 간다라 지역에서 불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죠. 물론 인도 아대륙 안에서도 마투라(Mathura)에서 자체적으로 불상을 만들기 시작했고요. 그제야 무불상 시대가 끝나고 불상 시대가 시작됩니다. 불교 탄생 이후 500여 년이 지난 뒤의 일이었습니다.
▲ 스투파로 올라가는 언덕길에서 소를 만났다. |
ⓒ Widerstand |
하지만 스투파는 남았습니다. 2천년이 넘게 그 자리에 서서 남았습니다. 이 탑을 세우라 말한 왕도 이제는 없습니다. 벽돌을 올렸을 석공도 이제는 이름조차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탑만은 남아 여행자를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승원은 이제 없지만, 수행하던 승려들의 마음만은 남았습니다.
무불상 시대에 대해 처음 배웠을 때가 기억납니다. 교수님이 보여주신 슬라이드로 산치 스투파를 보면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 정도의 뛰어난 조각 능력을 가지고, 대체 불상을 만들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저는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표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영원히 남을 수 있는 것도 있겠죠. 표현되지 않았을 뿐, 그곳에 있다는 걸 모두가 알 수 있는 것도 있는 법입니다. 꼭 불상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그들이 이 탑을 세웠을 마음도 표현되지 않은 불상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마음도 어디에도 표현되지 않았지만, 어디에나 변하지 않고 남아있는 것이겠죠. 표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탑의 벽돌 하나하나에 아마 영영 지워지지 않고 남을 수 있겠죠.
산치의 모습은 스투파가 세워졌을 2천년 전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넓게 펼쳐진 논밭과 그 사이를 유유히 지나가는 소 몇 마리. 하지만 그 풍경은 별로 황량해 보이지 않습니다. 높은 건물처럼 눈에 띄게 보이지는 않아도, 영원히 남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에 동시 게재됩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