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기자 북클럽] 세계를 돌아다니는 번역가에게 언어보다 중요한 것

김현진 2023. 4. 8.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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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시내의 <작가 피정 ; 경계와 소란 속에 머물다> 를 읽고

책을 통해 책 너머의 세상을 봅니다. 서평 쓰는 사람들의 모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북클럽'입니다. <편집자말>

[김현진 기자]

3년 전 이맘때의 일이다. 딸아이가 팔꿈치 골절로 수술을 받았다. 당시 수술이 급작스레 연기되면서 아이는 똑같은 검사를 두 번 연달아 받아야 했는데, 아이 건강에 대한 걱정으로 무거운 마음을 더 아프게 한 건 의료진의 태도였다.

수술 연기에 대한 일방적 전화 통보, 상의 없이 정해진 검사 일정, 번복되는 검사. 규정상 따라야 한다는 지시 외에 납득할 만한 설명이나 사과, 안타까움의 말은 전혀 없었다. 어린 아이에게는 사소한 검사도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겨운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처사였다.

보호자로서 내가 받은 처우가 못마땅한 마음에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내가 남자였어도 이렇게 함부로 대했을까. 전문직에 종사하는 중년의 남자였다면 다르지 않았을까. 수술을 집도하는 의료진의 심기를 상하게 할까 봐 불만을 제기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때의 감정과 상처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남아 있다.

이제야 그 감정도 '마이너 필링스'이겠구나 생각한다. 노시내 작가의 <작가 피정 ; 경계와 소란 속에 머물다>(마티)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작가 피정 ; 경계와 소란 속에 머물다> 표지 사진.
ⓒ 마티
 
"명시적이거나 묵시적인 인종차별에 늘 노출되는데도 그건 네가 지나치게 예민한 거라며 내 인식이 폄하당할 때 느끼는 혼란과 분노와 우울의 감정, 그것이 마이너 필링스다. (…) 이 소수적 감정이 꼭 인종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여성, 장애인 등 모든 소수자에게 적용되는 것이라면, 비록 한국에 살았어도 그 감정을 모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한국에서 여성으로 성장하고 교육받고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집을 나설 때마다 '너희가 나를 하찮은 존재로 만들 권리는 없다'라고 속으로 외쳤으니까." (61~62쪽 <작가 피정>, 노시내, 마티)

그때 나의 생각도 이와 비슷했다. 행여 무시당할까 봐 옷차림에 주의했고 안내해주는 절차나 지시를 틀리지 않도록 신경을 곤두세웠다.

<작가 피정>을 읽으며 노시내 작가의 생각과 태도에 크게 공감할 수 있었던 것도 인종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사회적으로 소수자 입장에 서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이 어린 여직원으로 사회생활을 할 때, 아이를 임신했을 때, 전업 주부로 아이를 돌보며 서서히 중년의 여성이 되어가면서 말이다.

번역가이자 소수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과 사람들

노시내 번역가·작가는 미국에서 아시아인으로 살아가는 소수자의 감정 문제를 다룬 캐시 박 홍의 <마이너 필링스>(마티)를 번역하기도 했다. 그녀 자신도 워싱턴과 빈, 베른과 취리히, 모스크바,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 등 다양한 나라를 이동하며 소수자의 삶을 살고 있다.

지금은 이슬라마바드에 주거지를 두고 있으나 편도 수술로 인해 한시적으로 취리히에 홀로 체류하며 <작가 피정>을 썼다. 이민자이자 외부자, 소수자, 번역가이자 언어 관찰자로서의 정체성이 통합되어서일까. 책에 쓰인 글은 일기 형식이지만 다양한 문화와 언어, 역사·정치를 비교하는 사회학적 성격을 띤다.

집필 당시 머물던 숙소에서 스위스 공영 방송이 나오지 않자 의아해하며 저자가 하는 설명이 인상적이다. 스위스에서는 한 가구당 1년에 365프랑을 수신료로 내는데 원화로 환산하면 연간 약 46만 원. 독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그리고 로만슈어까지 네 개의 공용어를 사용하는 스위스는 공영방송 또한 네 개 언어로 제작하기 때문에 비용이 많이 든다. 특히 사용 인구가 적은 로만슈어나 이탈리아어 사용자를 위해 별도의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일은 이익과 상관없는 공공 서비스에 속한다.

한때 수신료 철폐 문제가 국민투표에 부쳐졌지만 과반수가 반대했고 이를 계기로 공영 방송은 자체적으로 수신료 인하를 단행했다. 여기에는 소수 언어를 사용하는 소수자의 권리 보호를 위해 기꺼이 비용을 부담하겠다는 스위스 사회의 다원주의가 담겨 있다고 저자는 세심하게 읽어낸다.

러시아에서 살았던 이력 때문인지, 책을 쓸 당시 시작되었던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언급도 자주 등장한다. 푸틴의 야욕에 대한 비판적 시선과 러시아 내부에 팽배한 정권에 대한 불신을 전하면서도 생활 속에서 접했던 러시아의 선한 일반인들에게 잘못된 선입견이 드리울까 하는 걱정을 잊지 않는다.

이민자인 시아버지 빈첸초에 대한 이야기도 가슴 뭉클하다. 시아버지 빈첸초와 시어머니 마틸데는 이탈리아에서의 어려운 삶을 극복하고자 스위스로 이주한 이민 노동자였다. 이탈리아 이민 2세인 남편 알베르토는 이탈리아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할 줄 모르는데 거기에는 아픈 사연이 숨어 있다.

2차 세계대전 후 경제 붐이 일었을 때 스위스는 건축과 제조업 현장의 부족한 일손을 이민 노동자를 들여 보충했다. 그중 절대다수가 이탈리아인이었는데 점차 이탈리아 이민자에 대한 반감이 심해졌고 급기야 1970년에는 외국인 인구 비율을 10퍼센트 이하로 제한하자는 국민 발안이 제기되었다고 한다.

이 표결은 부결(찬성 46%)되었지만 이민자 혐오 정서는 계속되었고 그 과정에서 빈첸초는 차별과 따돌림을 당했다. 이에 상처받고 좌절한 빈첸초는 자신이 이탈리아 사람임을 상기시키는 것을 증오하며 이탈리아와 관련된 모든 것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랬던 그가 말년에 실어증을 앓으며 입을 닫았지만 마지막까지 그의 입에서 조각조각 흘러나온 단어는 이탈리아어였다. 그는 끝내 모어마저 상실했지만 저자와 남편이 찾아갈 때마다 미소와 포옹으로 반겨주었고 말없이도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할 수 있었다.

언어보다 중요한 것은 몸짓과 표정

여러 나라에서의 생활, 언어에 예민한 번역가라는 이력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방점을 두는 것은 언어 자체보다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지닌 몸짓과 표정이었다.

치료를 앞두고 불안해하는 자신의 손을 잡아준 의사, 맛을 보라며 자신의 과자 봉지를 열어 내민 낯선 사람, 길 가다 우연히 마주친 눈빛에 웃음을 던져준 아이, 자신과 타인을 배려해 마스크 착용을 지키고 누군가의 편의를 위해 몸을 움직이는 사람들, 그리고 언어를 잃은 시아버지의 미소와 포옹까지. 말이 아닌 신체 언어로 소통했던 저자의 기록이 어디든 사람 사는 곳이라면 기본적인 마음은 전해지기 마련이라는 나의 믿음을 강화해 주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더라도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는 전할 수 있다.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일은 무언가를 배워야만 실행할 수 있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같이 있어도 괜찮다는 부드러운 표정과 이해해 보겠다는 옅은 미소, 도울 수 있다는 사소한 몸짓으로 충분하다.

점차 다문화 사회로 변해가고 있는 한국에서도 쉽게 이민자를 마주하게 된다. 몇 년 사이 아파트 단지 내 외국인도 늘었고 엘리베이터나 놀이터에서 중국어를 쓰는 아이의 엄마나 중국인 돌보미를 만날 수 있다.

아이들이 노는 사이 자연스레 말을 섞고 친분을 쌓는 한국 엄마들과 달리 이들은 놀이터에서 놀지 않고 바삐 지나쳐 가거나 놀더라도 외따로 머무는 경우가 많다. 문득 그들을 마주쳤을 때 나의 표정이 어땠는지 돌아보게 된다. 먼저 인사를 건넨 적은 있는지, 같이 어울리고 싶다는 호의의 표정을 지니고 있었는지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며 생활 속에서 잊지 말아야 할 포용적 태도를 다시 한번 점검한다.  
 
"이민자는 한 명, 한 명이 다 이야기책이다." (274쪽)

내가 만나는 사람 한 명, 한 명이 각자 고유한 한 권의 책이라 생각하면 사람들을 대할 때의 마음과 태도가 달라질 것 같다. 표지를 살피고 첫 장을 넘겨 목차를 훑어본 후, 책의 내용과 난이도에 따라 적당한 속도로 읽어 나가듯, 개개인이 지닌 삶의 내용과 다름에 열린 마음으로 조심스레 다가가야 할 것이다. 관심과 존중이라는 첫 단추를 잘 끼우 것을 잊지 말고.

삼 년 전 딸아이의 수술을 담당한 의료진에게 내가 바랐던 것도 인간적인 관심과 존중이었다. 급작스런 변경에 대한 사과나 아이의 고통에 대한 배려의 말 또는 제스처 하나만 있었어도 상처는 눈 녹듯 사라졌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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