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살이] 회의에서 질문했을 뿐인데 내 일이 되었다
3040시민기자들이 쓰는 달콤살벌한 순도 99.9%의 현실 직장인 이야기. <편집자말>
[남희한 기자]
"아... 괜히 말해가지고 일만 받았네..."
회의가 끝나자 한 사람의 입에서 후회의 말이 흘러나왔다. 자칫 바로 앞에 있는 내 귀에도 닿지 못할 듯 힘이 없다. 돌아보니 언제나 이해가 될 때까지 질문하고 조금의 의구심이라도 생기면 해소될 때까지 의견을 구하는 매사 적극적인 후배였다. 이번 회의에서도 열심히 질문하고 의견을 말했던 친구는 자조적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아... 말하면 안 되는구나.' 잘못된 상황이 만들어 낸 초점이 어긋난 깨달음이다. |
ⓒ elements.envato |
"ㅋㅋㅋ 그래서 저는 입 다물고 있었잖아요."(방긋)
옆에서 푸념을 듣고 있던 또 다른 후배의 밝은 얼굴과 말이 눈과 귀에 꽂혔다. 자유로운 분위기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리 자유롭지 않았다. 모난 사람이 없고 리더부터 유머감각이 있어 누구나 편하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것과는 무관하게 '누군가는 일을 해야 하는' 회사의 태생적인 제약사항이 있었다. 나대면 일을 받게 되리라!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의 입을 봉하는 주문을 걸고 있었다.
"아까 했던 말 취소하면 안 되나요?"
어깨를 토닥이는 내게 건네는 후배의 농담이 못내 씁쓸하다.
문제를 제기하면 해결의 주체가 되고 의견을 얘기하면 증명해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사안마다 차이가 있을 순 있지만 어쩌다 책임을 떠안게 된 당사자조차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문제 같아 보이지 않지만 문제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일이 너무나 자연스럽다는 사실이다. 마치 가랑비에 옷이 젖듯 스리슬쩍 누군가에게 책임이 전가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그걸 깨닫는 순간 득도(?)를 경험한다. '아... 말하면 안 되는구나.' 잘못된 상황이 만들어 낸 초점이 어긋난 깨달음이다.
큰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유구무언의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사뭇 독특하지만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겪고 있을 일상이다. 발언의 자유가 아닌 발언에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회의의 반란자
그 마음 때문인지 얼마 전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목적을 정확히 알 수 없는 회의에 초대되었을 때였다.
"이 회의... 꼭 필요한 건가요?"
주최자의 개요 설명이 끝나는 시점에 회의에 대한 회의감을 표했다. 단순한 질문이었다. 그런데 누구도 회의의 필요성을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지난 경험과 추측에 기댄 복고적이고 감성 충만한 필요성이 제기되었지만 그다지 감흥이 없었다. 질문이 의구심으로 바뀌었다.
"이해를 잘하지 못해 죄송한데, 이게 이렇고 저게 저렇다면 이 회의는 딱히 필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미안하게도 공감대가 부족한 나는 모두를 잠시 동안 멍한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준비된 두 가지 안이 선택의 문제가 아님이 확인됐다. 몇 가지 사실 확인만으로 방향이 결정되는 논의가 불필요한 사안이었다. 결국 장단점을 검토하는 회의는 무의미해졌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그 사실 확인의 주체가 슬며시 나로 변경되려는 것을 감지한 것이다. 회의에 대한 회의감을 가졌던 나로선 회의에 회의적이었던 사람이 확인하자는 회의의 분위기에 무척이나 황당해 회의감을 또 느꼈다.
나도 모르게 한탄이 나오려했다. 그리고 동시에 이때다 싶었다. 나는 흘러나오는 한탄에서 울화를 조금 빼고 하소연을 섞어 방출하기 시작했다. 이건 좀 아닌 것 같다고, 이래서는 누구도 의견을 내놓지 않을 거라고, 당연하다는 듯한 이런 분위기가 우리 후배들을 어떻게 만드는지 아시냐고. 감정이 제대로 묻어 난 직장 생활 15년차 후배의 치기(?)가 선배들 앞에 쏟아졌다.
나의 급발진에 선배들은 당황했다. '내가 그랬다고?' 선배들은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사실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들의 반응이 이해됐다. 이런 말을 내뱉은 나조차도 얼마 전까지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패턴이기 때문이다. 직접 닥쳐보지 못하면 무심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다.
지시 받지 않고도 확인해 볼 것들을 자연스레 노트에 정리해 두었음에도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그게 너무 자연스러워서였다. 그리고 마치 준비되어 있었던 듯 항변이 쏟아진 것은 경험적 불안 때문이었다. 우려하던 상황이 생겼을 때 일어나는 발작 같은 반응 말이다.
다행히 선배들의 얼굴엔 '쟤가 갑자기 왜 저러나' 하는 의아함은 없었다. 잠시 모두가 씩씩대는 후배의 말을 경청해주었고 그 어떤 반박이나 감정적 대응도 없었다. 뭐, 이런 선배들이기에 얘기한 것이긴 했지만 역시나 고마웠다. 덕분에 급발진 하던 마음에 제동이 걸렸다.
▲ 상대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배려가 필요하다. |
ⓒ Pixabay |
의견을 건네면 일을 건네받고 반론을 제기하면 그럼 네가 해보라는 이야기를 듣는 곳에서 사람들의 입은 닫힌다. 발표자의 말만 공허하게 퍼지고 누구도 반박하지 않는다.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 나냐면... 이게 참 큰일인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토의는 형식적일 뿐이고 사람들은 시간을 낭비했다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안위만을 생각하는 곳에서 발전은 요원해진다.
떠넘기기는 곤란하다. 원치 않는 일을 말 한 마디로 떠넘기는 것은 순순히 넘어갈 일이 아니다. 응당 서로의 입장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러니까 이건 배려의 문제인 거다.
함께 생활하는 직장 동료 사이에 황금률(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이 필요하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는 태도는 대다수의 문제를 단순하게 만든다. 하다못해 내가 싫은 것은 남도 싫어할 수 있다는 것만 기억해도 많은 문제가 해결된다. 의견을 말했을 때 받고 싶은 것은 칭찬이나 고마움이지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우리는 종종 감정에 많은 것이 좌우되는 존재임을 잊곤 한다. 쌓여 있는 일에 가려져 보지 못하고 일이 급해 지나친다. 그렇게 저도 모르게 서로에게 불만을 쌓게 만들고 스스로를 지키는 데만 이골이 나게 한다. 가끔 나로 인해 쌓아올려졌을지도 모를 공고한 벽을 마주할 때면 답답함과 함께 미안함이 함께 일어나는 이유다.
노크가 필요하다. 혹시 방해가 되진 않는지, 들어가도 괜찮은지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최소한의 배려는 상대방의 처지와 감정을 묻는 것만으로도 실천할 수 있다. 예고도 없이 벌컥 문을 연다거나 불쑥 얼굴을 내미는 것은 벽을 쌓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이제부터라도 벽을 허물어야 한다. 최소한 낮추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일을 가장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은 단연 리더다. 책임질 사람만 있으면 된다거나 누가 해도 해내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은 잠시 뒤로 하고 한 명 한 명을 둘러보았으면 한다.
대단한 일이지만 특별한 일은 아니다. 현재의 여건을 묻고 해야 할 일의 의미와 그 일이 완료되었을 때 누릴 수 있는 이점을 분명하게 알려 준다면 대부분이 결정에 수긍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이런 과정이 생략되곤 한다. 그것은 누구도 원치 않을 것이 확실하거나 큰 의미가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할 때 더 심해진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받는 것과 누구나 할 수 없는 일을 받는 것은 다르다. 그것은 무시와 인정만큼 큰 차이다. 나의 의지가 반영되었느냐 아니냐는 자발성에 영향을 주고 더 나아가 결과의 질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이런 경우 리더는 누군가는 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일임을 설명하고 한 사람에게 그런 일이 자주 돌아가지 않도록 배려해야 할 테다.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자연스레 일어나는 일이 많다. 한편으론 원활함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부적절한 것에 대한 익숙함일지도 모른다. 자연스러움은 대단한 힘이다. 그 대단한 힘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 알게 모르게 행해왔던 관습적인 행동을 돌아 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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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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