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하게 꺾인 만년필 펜촉, 맨손으로 살려냅니다 [김덕래의 만년필 이야기]
만년필을 수리하며 만난 사람들의 따뜻한 사연과 그 속에서 얻은 깊은 통찰을 전합니다. 갈수록 디지털화 되어가는 세상에서, 필기구 한 자루에 온기를 담아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습니다. 온/오프(On/Off)로 모든 게 결정되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아날로그 한 조각을 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펜닥터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기자말>
[김덕래 기자]
4년 만에 다시 열리는 여의도 벚꽃 축제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감이 한창입니다. 또 진해의 군항제 규모가 워낙 커 봄꽃은 벚꽃이 팔 할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4월은 전국 어디나 갖가지 꽃들의 잔칫날입니다.
이미 상춘객을 맞은 지 오래인 매화를 시작으로, 개나리와 산수유가 뒤를 잇고, 진달래와 벚꽃이 따라옵니다. 때를 놓쳤다 아쉬워할 것도 없는 것이, 튤립과 장미가 바통을 이어받아 부지런히 개화합니다. 이외에도 무수히 많은 꽃들이 줄 서 있으니, 당분간 주변 어디를 둘러봐도 꽃대궐입니다.
해마다 며칠 안팎 편차는 있지만, 기실 이 꽃들은 작년에도 또 재작년에도 한결같이 피고 졌습니다. 그럼에도 마치 4년 만에 처음 핀 것처럼 느껴지는 까닭은, 우리 마음이 노상 겨울이었기 때문이겠지요.
건강한 사람은 쓰고, 달며, 시고, 짠 데다, 맵기까지 한 다섯 가지 맛을 다 알아챕니다. 그런데 몸 안쪽 어디가 망가지면 이중 어느 한 가지 이상의 맛을 잃습니다. 그뿐 아니라 마음이 힘들면 사계절이 바뀌는 것에도 둔감해집니다. 나른하고 따뜻하다가, 이내 서늘해졌다 어느새 차가워지는, 서로 다른 사계절의 맛을 온전히 감지하지 못합니다. 그저 진저리 나게 더운 여름, 혹독하게 추운 겨울만 반복됩니다.
만년필도 그저 잉크가 끊김 없이 잘 나오면 정상, 그렇지 않으면 비정상이란 틀 안에서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잘못되었다 말하기엔 모호하지만, 정답은 아닙니다. 정상적인 상태의 만년필은 사계절과 닮은 구석이 있습니다. 잉크가 잘 나와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기본 전제입니다. 끊김 없이 써지며 부드럽고, 탄력이 있으면서도 사각이는 등의 다채로움이 담보될 때, 만년필 쓰는 즐거움은 배가 됩니다.
만년필의 대중화에 기여한 플래티그넘
'플래티그넘(Platignum)'은 국내에 잘 알려진 필기구 제조사는 아닙니다만, 꽤 오랜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오로라, 일본의 플래티넘과 같은 해인 1919년 탄생했으니, 100년이 훌쩍 넘는 셈이지요. 같은 계절에 피는 꽃도 생김새와 색깔, 크기와 향이 다 다른 것처럼, 플래티그넘은 동일한 영국 브랜드 콘웨이 스튜어트, 오노토와 결이 다릅니다.
▲ 영국 만년필 브랜드 플래티그넘(Platignum) 스튜디오를 둘러싼 다양한 색상의 만년필 군집 |
ⓒ 김덕래 |
난(蘭) 백여 촉(난을 세는 단위) 이상을 키우는 재미에 푹 빠진 지인의 말에 의하면, 난은 키우기 어렵다기보단 손이 많이 가는 편에 가깝다 합니다. 볕을 쬐기는 하되 강한 직사광선에 오래 노출되면 안 되고, 물이 영 없어서도 곤란하지만 넘치게 공급되어도 상하기 쉽다는 거지요. 적당량의 볕과 바람, 부족하지도 과하지도 않은 수분이 난을 키웁니다.
이렇게만 보면 세상 까다롭게만 보여도, 새 촉 돋아나는 소리 듣는 맛과 보는 재미가 몇 곱절 더하답니다. 키우는 수고 이상의 즐거움을 선사해 밀쳐낼 수가 없다는 그 말을 알 것도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보면 금촉 만년필 한 자루를 들이는 건, 난 한 촉 키우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셈입니다.
사람이 특별히 손쓰지 않아도 알아서 잘 자라는 야생화의 우리말이 들꽃입니다. 애기똥풀, 제비꽃, 민들레, 할미꽃을 포함해 무수한 봄꽃이 있습니다.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어 가벼이 여기기 쉽지만, 흔하다는 것이 결코 아름다움이 덜하단 뜻은 아닙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스틸촉이 장착된 만년필 한 자루는, 들에 핀 꽃 한 송이에 비견될 만합니다. 잘 길이 든 스틸촉 만년필은 어지간한 금촉 만년필의 필기감을 넘어섭니다.
이 펜은 플래티그넘의 스튜디오 중에서, 캡과 배럴 전체가 활짝 핀 개나리를 떠올리게 하는 노란색입니다. 금촉은 작은 충격에도 쉽게 휘어지지만, 스틸촉은 상대적으로 잘 버텨줍니다.
▲ 펜촉이 심하게 뒤로 꺾인 플래티그넘 스튜디오 옐로우 F촉 |
ⓒ 김덕래 |
▲ 상단 좌측부터 시계방향으로 펜촉이 조금씩 원형을 회복하고 있습니다 |
ⓒ 김덕래 |
가끔 물어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정말 맨손으로만 펜촉을 수리하는 게 가능한가요?"
펜촉 상태에 따라 때때로 연한 나뭇조각, 얇은 플라스틱 따위를 쓰기도 하지만, 대부분 맨손만 사용합니다. 도구를 사용하면 내가 원하는 것보다 순간적으로 과한 힘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휘어진 펜촉을 펴는 과정에서 적정치 이상의 힘이 전달되면, 되레 반대 방향으로 굽어버리는 거지요.
아차 싶어 다시 반대로 지나친 힘을 싣다, 그 과정이 몇 차례 반복되면 펜촉의 내구성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크랙이 생기거나 심한 경우 부러질 수도 있어요. 내 감각기관과 직결된 손만 쓰면 위험도가 낮아집니다. 민감한 펜촉을 만지는 일이니, 그보다 더 섬세한 사람의 손을 사용하는 거라 보면 맞습니다. 사람의 손은 생각보다 꽤 요긴한 도구입니다.
국도를 달리면 고속도로를 타는 것보다 목적지에 도달하는 속도는 느려도, 길 좌우의 풍경을 감상하는 맛이 있습니다. 또 걸어 다니면 자동차를 타고 내달릴 때보다 더 세세한 것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꽃향기가 더 진하게 풍기고, 새소리가 한층 선명하게 들립니다. 느리게 가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분명 있는 것처럼, 천천히 접근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또 때때로 그게 가장 빠른 길이 되기도 합니다. 사람의 손은 거짓말 같은 마법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 가장 좋은 수리도구, 바로 사람의 손입니다 |
ⓒ 김덕래 |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는 말이 있습니다. 펜촉을 살리고 나니 다른 부분이 눈에 들어옵니다. 스튜디오는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져 가벼우면서도 내구성이 좋은 편이지만, 고무로 감싸진 그립 섹션이 영 아쉽습니다. 손에 쥐었을 때 미끄러지지 않게끔 디자인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끈적해져 개운하지가 않아요.
▲ 상단 좌측에서 시계방향으로 그립 섹션에 마스킹 테이프를 감는 과정입니다 |
ⓒ 김덕래 |
잘 손봐진 펜으로 은사님의 시 한 편을 필사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 아직 한 번도 찾아뵙지 못한 참 무심한 제자입니다. 이 시는 1981년 출간된 또 '다른 별에서'라는 시집에 실린 '고백'입니다.
저보다도 젊은 40대 초반 쓴 글이어서인지 문장이 달달합니다. 마치 어릴 때 자주 따먹던 등굣길 양쪽에 핀 샐비어 꽃잎 속 꿀같습니다. 따뜻한 봄날, 잘 손봐진 펜을 손에 쥐고 꽃보다 더 단내가 나는 시 한 편 쓰는 호사를 누려봅니다.
아직 봄꽃향기 제대로 맡지 못했다면, 더 늦기 전에 집 근처라도 한 바퀴 둘러보길 권합니다. 그마저도 쉽지 않다면, 아무 펜이나 손에 쥐고 아무 종이에라도 좋아하는 시 한 편 따라 써보세요.
▲ 1981년 출간된 김혜순 시집 '또 다른 별에서' 중 '고백'을 필사했습니다 |
ⓒ 김덕래 |
- 지금으로부터 104년전 영국에서 탄생한 필기구 브랜드. 비교적 금액대가 낮은 펜을 생산해 만년필 사용자 저변 확대에 힘을 보태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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