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히든캐스트(126)] 김성재 “선물처럼 다가온 ‘호프’, 망설일 필요 없었죠”

박정선 2023. 4. 8.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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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에서 주연배우의 상황을 드러내거나 사건을 고조시키는 배우들이 있습니다. 코러스 혹은 움직임, 동작으로 극에 생동감을 더하면서 뮤지컬을 돋보이게 하는 앙상블 배우들을 주목합니다. 국내에선 ‘주연이 되지 못한 배우’라는 인식이 있는데, 이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주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알앤디웍스

뮤지컬 ‘호프: 읽히지 않은 책과 읽히지 않은 인생’(이하 ‘호프’)는 현대 문학 거장의 미발표 원고를 둘러싼 재판을 중심으로 평생 원고만 지키며 살아온 78세 에바 호프의 삶을 그린다. 이 작품에서는 현대 문학 거장의 미발표 원고를 의인화한 캐릭터 K가 등장하고, 또 그들의 분신으로 존재하는 책갈피가 무대를 채운다.


이 극에서 책갈피는 앙상블 배우들이 맡는다. 뮤지컬 배우 김성재는 네 명의 책갈피 중 한 명으로서 법정에서는 법정 경위로, 수용소에서는 소로스로, 또 그밖에 씬들에서도 여러 가지 역할들로 분하면서 극에 녹아들고 있다.


-뮤지컬 ‘호프’와는 어떻게 인연이 됐나요?


‘호프’는 말 그대로 갑작스러운 선물처럼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한창 매체 연기를 제대로 도전하기 위해 영화와 드라마 촬영을 하던 2022년, ‘호프’의 안무 감독이신 채현원 감독님께서 아무 기별도 없이 깜짝 캐스팅 제의를 해주셨어요. 마침 무대에 대한 갈증도 있었고, ‘호프’가 어떤 작품인지 주변 지인들에게 끊임없이 좋은 얘기들을 들어왔기 때문에 망설이지 않고 응했죠.


-연습 과정에서 잊지 못할 특별한 일화가 있었나요?


‘호프’는 리딩 때부터 참 많은 선배님들과 동료들이 울었습니다. 각자가 느낀 심상은 달라도 ‘호프’라는 작품이 주는 거대한 자극이 연습의 마지막 런스루까지 저희에게 다가왔기 때문이죠. 도저히 그 슬픔이 익숙해지지 않았습니다. 특히 저는 별명이 ‘꼭지’였을 정도로 울었어요(웃음). 마지막 장까지 꾹 참다가 극만 끝나면 의자에 앉아서 오열했거든요. 그때마다 형들이 웃으면서 꼭 영상을 찍어주셨던 게 생각납니다.


-연습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요?


지금까지 해온 타 작품의 앙상블은 에너제틱 하게 춤을 춘다거나, 기능적인 역할을 소화한다거나, 각 넘버의 정서에 맞춰 분위기를 형성하고, 무대를 훨씬 생동감 있게 하는 등 대부분 정해진 포맷이 있다고 생각했는데요. ‘책갈피’라고 불리는 호프의 앙상블은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면서도 대부분 초월적인 존재처럼 극의 일부로 녹아 있어야 했기에 발산과 표현의 정도가 매우 섬세하게 조절해야 했습니다. 연출님과 함께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그 정도를 찾는 것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책갈피(앙상블)로 무대에 오르고 있어요. 어떤 역할인가요?


법정에서는 법정 경위로, 수용소에서는 소로스로, 그 밖에는 씬에 적합한 인물로 변신하고 있습니다. 법정 경위는 4명 중 유일하게 비상 상황에 가장 먼저 대처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서 있는 자세나 행동, 표정 등을 군인과 같이 날카롭고 딱딱하게, 깔끔하게 해내고 싶었습니다. 또한 유대인 수용소의 소로스 역할은 정말 잘 해내고 싶은 욕심이 강했는데요, 연습이 끝날 때마다 홀로코스트에 관한 영화, 다큐멘터리, 서적 등 닥치는 대로 자료 조사를 하고, 그 당시 수용소 사람들이 어떻게 고통 받았는지, 어디가 아픈지, 유행했던 질병의 증상이 어떤지 등 필요하다면 신체의 일부분을 조절하는 상태에 대한 상상을 계속해서 시도했습니다.


-이 작품에서 앙상블은 어떤 쓰임을 하고 있나요?


‘호프’의 책갈피는 이름처럼 원고지인 K의 분신들로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물의 의인화된 존재라서 인간 같지는 않지만, 호프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는, 그래서 그의 상상에서 살아 숨 쉬는 초월적인 존재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희 네 명의 개성을 최소화하고 비로소 하나로 보일 때 이 극의 책갈피는 완성이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알앤디웍스

-‘호프’에 대한 애정이 큰 것 같은데요. 이전에 참여했던 뮤지컬들과 어떤 점이 다르기 때문일까요?


지금까지 참여했던 뮤지컬은 대부분 에너지와 매력, 색깔의 발산이 주된 미션이었다면 ‘호프’는, 특히 앙상블은 나의 불필요한 텐션, 색깔들을 최대한으로 빼고 오로지 최소한의 힘으로 극을 이끌어 나가야하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 같습니다.


-극중 가장 애정하는 넘버(혹은 장면)이 있다면?


‘길 위의 나그네’를 가장 좋아합니다. 노래 가사 속 나그네처럼 추운 겨울, 무겁게 내린 눈 속에서 쓸쓸히 살아가던 아버지께서 2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이 노래를 듣고 부를 때마다 아버지 생각이 참 많이 나고 마음껏 그리워할 수 있어서 좋아요.


-이 작품을 통해 배운 점, 느낀 점도 있을까요?


뜬금없을 수도 있지만 작품에 임하는 배우의 마음가짐에 대해 굉장히 많이 배웠어요. ‘호프’라는 작품은 대본을 읽을 때부터 참 제게 힘이 됐고,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78세 노인이 수고했다, 충분하다, 늦지 않았다고 살며시 말을 걸어주는 느낌으로 인해 꽤 많은 고통 속에서 해방된 느낌을 받았어요. 제가 느낀 이 감정을 호프를 보는 관객 분들에게 꼭 전해드리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고, 그게 김성재라는 배우가 이 작품을 조금이라도 관객들에게 전달하려면 늘 한 회, 한 회를 소중히 여기고 103회의 공연 중 1초도 소홀하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졌어요.


-관객들에게 ‘호프’를 한 단어, 혹은 한 문장으로 소개하자면요?


‘나를 찾는 여행’


-2017년 ‘메리골드’로 데뷔하셨다고요?


원래 꿈은 가수였어요. 노래만 하다가 우연히 뮤지컬을 전공하게 됐고, 그때까진 이 일에 대한 거창한 목표 같은 것 없이 정신없이 ‘무대에 서고 싶다!’라는 생각만 가지고 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열심히만 했던 기억이 나요.


-데뷔 때와 지금, 스스로에게 생긴 가장 큰 변화가 있다면?


불과 몇 년 전까진 빨리 배우로 성공하고 싶다, 유명해지고 싶다 등 다소 얕은 생각으로 발버둥을 치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적지 않은 작품들을 거치고 깨지고 성장하면서 배우라는 직업, 연기라는 행위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해요. 덕분에 더 이상 빨리 잘 되고 싶다는 강박관념 없이 차분하게 내면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참여한 작품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호프’요. ‘호프’라는 작품의 메시지, 창작진의 작업 방식, 기라성 같은 선배님들의 연기를 직접보고 같이 하며 소통하는 이 시간들 등 ‘호프’는 제게 정서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연기적으로도 커다란 성장과 숙제를 줬어요. 30대 초반이 된 이 시기에 ‘호프’가 준 선물은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될 것이고 더 좋은 방향으로 갈 것이라는 확신이 들어요.


ⓒ알앤디웍스


-앞으로 또 어떤 작품, 어떤 캐릭터를 연기해보고 싶으신지도 궁금해요.


가장 어려워하는 질문인데 ‘호프’를 하며 연기적인 갈증이 굉장히 커져서, 작품과 캐릭터성은 상관없이 크지 않더라도 서사가 있는 배역을 맡아보고 싶어요. 다양한 스펙트럼의 배역을 맡으며 연기하는 것이 원래 모토여서 배역은 가리지 않지만, 집요하게 파고 연구할 수 있는 그런 캐릭터였으면 좋겠어요.


-뮤지컬 외에도 드라마, 영화, 광고까지 다방면으로 활동하고 계시더라고요.


무대와 매체의 연기 메커니즘은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해서 처음에는 적응하기 굉장히 힘들었는데, 오히려 각각의 특성들이 반대쪽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부분도 있고, 공통적으로 지향해야할 저만의 연기 가치관이 생기니까 오히려 재미있는 도전이 되는 것 같습니다.


-여러 장르를 오가면서 스스로 중심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할 것 같아요.


맞아요. 그 중심을 찾기 위해 굉장히 노력했고 지금도 노력 중이죠. 가장 중요한 건 ‘연기’라는 행위를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하고 싶은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단순히 남들이 하는 것처럼, 책에서 읽은 대로, 학원에서 배운 대로만 한다면 연기는 그저 일이 되겠지만 저만의 소신이 담기고, 자신만의 방향성이 생기면 굉장히 생산적인 예술이 되고 일단 재미있어요. 그 재미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뮤지컬 배우를 꿈꾸던 과정, 그리고 현재 활동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 있다면?


늘 저의 특이한 톤 때문에 어릴 때는 참 힘들었던 것 같아요. 뮤지컬을 하려면 어떤 특정 소리를 내야한다는 것처럼 강요하는 선생님들도 많았고, 억지로 발성을 바꾸려다 오히려 성대 결절에 걸려서 몇 달 동안 목소리가 안 나온 적도 있었어요. 그렇게 좋아하는 노래를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도 참 많이 했고요. 하지만 그때마다 이렇게 타고난 나의 목소리를 사랑하는 데 집중했어요. 참 힘들었지만 그로 인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나눌 수 있는 여유가 생겼고 타고나지 못한 다른 것에 대한 미련을 스스로 거둘 수 있는 능력도 저절로 만들어진 것 같아요.


-앞으로 대중들에게 어떤 모습들을 보여주고 싶으신가요?


누구나 할 수 있는 연기가 아닌 세상에 저밖에 못하는 연기를 보여드리고 싶고, 같은 배역을 맡더라도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서 모든 이들이 믿고 볼 수밖에 없는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정말 미친 듯이 노력해야 하겠지만 자신 있어요.


-배우로서, 김성재 씨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무엇인가요?


더 이상 어린 나이가 아니라고 느껴지는 이 시기에 이제는 앙상블이 아닌 배역을 하고 싶은 욕구가 커지는데, 과연 내가 한 배역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꽤 많이 해요. 연기에 대한 욕심이 굉장히 크기 때문에 이 고민은 제가 많은 작품을 하더라도 꽤 오래 할 것 같아요.


-김성재 배우가 생각하는 ‘좋은 배우’란?


극작가와 연출이 만든 허구의 환상의 세계에 생명과 사랑을 절실하게 불어넣어주는 사람.


-마지막으로, 김성재 배우의 최종 목표도 들려주세요.


평생 연기하다가 대사를 외우지 못하는 어느 날 명예롭게 그만 두는 것이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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