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당하거나 죽거나...헨리 8세 여섯 부인의 '불행 배틀'

나원정 2023. 4. 8.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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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식스 더 뮤지컬'. 지난달 한국어판 개막 전 영국 오리지널 출연진의 내한 공연 모습이다. 사진 아이엠컬처, Manuel Harlan

영국 왕 헨리 8세(1491~1547)의 기구한 여섯 아내가 ‘걸그룹’처럼 한 무대에 모였다. 500년 전 튜더 시대 여섯 왕비들의 역사를 새로 쓴 뮤지컬 ‘식스 더 뮤지컬’(이하 식스)이 지난달 처음으로 한국에 상륙했다.
헨리 8세에 의해 이혼 당하거나, 참수 당하거나, 죽거나, 살아남은 왕비들은 “우리가 ‘식스(Six)’” 라며 한 목소리로 자신들을 소개한다. 실제 역사에선 서로 만나지 못했거나 시기‧질투하는 사이였던 왕비들이 80분 간 폭발적인 화음을 빚어낸다.
남편의 그늘에 가려있던 여성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로 기울어진 역사를 고쳐 노래하는 통쾌한 무대다. 재위 기간 6번 결혼한 헨리8세의 스캔들 상대처럼 묘사돼 온 그들의 한풀이가 강렬한 팝음악 10곡에 실려 콘서트처럼 펼쳐진다. 팝 마당극이라 해도 좋을 만큼 관객에게 자주 말을 걸고, 춤과 노래는 흥이 넘친다.


걸그룹 방불케 하는 '헨리 8세 아내들' 팝무대


2017년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페스티벌에서 첫 상연, 이듬해 대표 넘버 ‘아이엠송(I'm Song)’이 영국 팝차트를 강타했다. 2019년 영국 웨스트엔드, 2020년 미국 브로드웨이에 입성했고, 지난해 제75회 토니상에서 2관왕(최우수 음악상‧뮤지컬 의상디자인상)을 차지했다. 영국 팝그룹 스파이스 걸스의 투어 의상으로 이름난 디자이너 가브리엘라 슬레이드가 의상을 맡았다. 비즈를 수놓은 수퍼히어로 수트 같은 독특한 미니 드레스, 킬힐이 내지르는 노래들과 감각적으로 어우러진다.
뮤지컬 '식스 더 뮤지컬' 한국판 캐릭터 포스터. 사진 아이엠컬처

한국에선 지난달 26일까지 3주간 영국 오리지널 출연진의 내한 공연에 이어, 지난달 31일부터 6월 25일까지 서울 삼성동 코엑스 아티움에서 최초 한국어 공연이 펼쳐진다. 뮤지컬 ‘보디가드’ ‘위키드’ 주역 손승연, ‘물랑루즈’ ‘킹키부츠’의 김지우, ‘이프덴’ ‘미세스다웃파이어’의 박혜나 등 파워 보컬이 뭉쳤다.
예매사이트 ‘인터파크’ 관람평점은 10점 만점에 9.8. “영국식 농담을 잘 살리지 못 했다”는 아쉬움도 있지만, “트렌디한 콘서트형 뮤지컬”, “여성으로만 구성된 공연은 처음 봤는데 감격스럽다”, “처음부터 끝까지 에너지 넘친다” 등 호평도 많다. 예민한 난봉꾼 헨리 8세에게 시달린 왕비들의 사연이 우리네 역사 속 여성들 못지 않아 공감이 간다는 반응도 있다.

이혼·참수·죽음…불행 배틀에서 나만의 노래로


헨리 8세는 종교 개혁, 중앙 집권화 등 업적은 남겼지만, 아내들에겐 가혹했다. 종교 개혁도 24년이나 결혼 생활을 해온 첫 부인 ‘아라곤의 캐서린’(이하 아라곤)과 이혼하기 위해 시작했다. 아름다운 앤 불린을 새 아내로 맞으려는데, 로마 교황이 이혼을 허락하지 않자, 로마 가톨릭과 결별하고 영국 국교회를 세웠던 것. 그렇게 재혼한 앤 불린도 아들을 못 낳고 애정이 식자 부정한 여자로 몰아 사형 시켰다. 나머지 네 왕비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식스’는 이런 역사를 ‘불행 경쟁’으로 풀기 시작한다. 헨리 8세에게 “가장 완벽하고, 기막히고, 개똥 같은 짓거리를 당한 사람”이 왕비 그룹의 리더가 된다는 설정이다. 각 캐릭터와 노래 스타일은 실존 팝스타에게서 착안해 완성했다.
자신을 수녀원에 가두려는 헨리 8세에게 “말도 안 된다”며 콧방귀를 날리는 아라곤(손승연‧이아름솔)은 비욘세와 샤키라에게 영감 받은 캐릭터다. 휴대전화에 중독된 인플루언서처럼 묘사되는 불린(김지우‧배수정)은 에이브릴 라빈, 릴리 알렌의 자유분방하고 반항적인 모습을 따왔다.
첫 아들을 낳다 요절한 셋째 왕비 시모어(박혜나‧박가람)는 아델과 시아(Sia)의 발라드풍 음악을 선보인다. 초상화와 실제 외모가 달라 독일에서 오자마자 왕에게 외면 당한 넷째 아내 클레페(김지선‧최현선)는 래퍼 니키 미나즈 풍의 경쾌하고 당당한 랩을 펼친다. 여섯 왕비 중 최연소이자, 헨리 8세와 30살 이상 나이 차가 났던 하워드는 어릴 때부터 남성들에게 성착취 당해온 끝에 왕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지난해 6월 미국 뉴욕 토니상 시상식에서 '식스 더 뮤지컬' 축하 공연을 펼치고 있다. AP=연합뉴스
뮤지컬 '식스 더 뮤지컬'. 지난달 한국어판 개막 전 영국 오리지널 출연진의 내한 공연 모습이다. 사진 아이엠컬처, Manuel Harlan


마지막 왕비 캐서린 파(유주혜‧홍지희)에 이르러 왕비들은 불행 경쟁 대신 자신들이 진짜 부르고 싶었던 노래에 대해 생각한다. 실제로 교육에 열정적이었고,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낸 영국 최초의 여성이었던 캐서린 파의 권유에 의해서다. 이들은 서로 힘을 합쳐 각자가 원했던 역사의 새로운 엔딩을 노래한다. “역사와는 다른 우리 얘기, 오늘 밤 부를까. 날 위해” 라면서.
“헨리, 집어치워. 난 할 만큼 했어. 네 사랑 따윈 관심 없어” 라고 주인공들이 내지르는 순간, 귀와 가슴이 뻥 뚫린다. “우릴 하나로 묶을 수 없다”는 노랫말 그대로가 뮤지컬의 주제다. 우리 역사에서 묻혀온 여성들의 목소리 또한 떠올려보게 된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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