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보다 못한 한국 정치에 경종을 울린다
[김성호 기자]
▲ 웨스트 윙 시즌 7 포스터 |
ⓒ NBC |
미국 NBC 드라마 <웨스트 윙>은 역대 가장 뛰어난 정치드라마로 꼽히는 걸출한 작품이다. 자타공인 세계 최고의 극작가 아론 소킨의 전성기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작품이며, 일곱 차례 거듭된 시리즈가 미국 방송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에미상을 휩쓸며 화제를 일으켰다.
그뿐인가. 미국 백악관 공보실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 드라마는 민주주의의 가능성과 한계, 또 자유세계를 이끄는 최강국 미국의 책무와 오만 또한 고스란히 담아내 정치와 국제관계에 관심 있는 지적인 시청자의 커다란 지지를 받았다.
<웨스트 윙> 외에도 <뉴스룸>을 비롯한 일련의 필모그래피에서 드러나듯, 소킨의 방대한 대사며 현실세계에 대한 깊은 관심이 가장 잘 녹아든 드라마라 하겠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 당시 이 드라마를 즐겨 시청한 건 유명한 일화이거니와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많은 이들이 이 드라마로부터 민주사회의 이상적 구현을 읽어내려 시도하고는 하였던 것이다.
▲ 웨스트 윙 스틸컷 |
ⓒ NBC |
치열한 미국대선, 그 향방을 가르는 사건
그중 마지막인 일곱 번째 시즌은 바틀렛 행정부의 말년으로, 민주당과 공화당의 대권후보가 경합을 벌이는 선거전으로 꾸려진다. 드라마 내내 쉴 새 없이 일하며 적잖은 성과를 낸 바틀렛 정권의 수고로움에도 미국 대중은 민주당보단 공화당 후보의 손을 들어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건 연임한 정권에 대한 교체론이 힘을 얻곤 하는 미국 정치의 역사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거니와 공화당 후보로 등장하는 아놀드 비닉(앨런 알다 분) 상원의원의 존재가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소킨이 생각하는 이상적 공화당원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비닉은 자유주의적이면서도 당당한 언행, 정치적 역량 등이 어우러져 현실 정치 속에선 지극히 만나기 어려운 진정한 보수주의자처럼 그려진다. 그런 비닉을 상대하는 정치인은 극적으로 경선에서 승리한 라틴계 3선 하원의원 매튜 산토스(지미 스미츠 분)다. 충실한 의정활동에도 전국적 인지도가 없던 그가 대선에서 강력한 후보를 물리치기까지의 이야기가 장장 7년을 이어온 이 드라마의 결말을 이룬다 해도 좋겠다.
열과 성을 다한 후보며 보좌진의 노력에도 유세 기간 대부분을 산토스는 비닉에게 크게 뒤진 채로 이어간다. 그러나 상황은 단 한 순간에 뒤바뀐다. 그건 바로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원자력 발전소 사고다.
▲ 웨스트 윙 방영 이후 미국 인터넷 사이트에선 드라마 속 대선후보의 포스터를 직접 제작해 공유하는 사례가 적잖았다 |
ⓒ NBC |
한국사회에 이 드라마가 전하는 메시지
전국적 화제가 된 사건은 대선 과정에도 영향을 미친다. 언론이 캘리포니아가 지역구인 공화당 비닉 후보가 해당 발전소 설립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알아내면서다. 원자력이 화석연료보다 경제적이며 안전한 에너지로 합리적 결정이었다는 비닉의 주장에도 민심이반은 가속화될 뿐이다. 언론은 연일 집중포화를 시작하고 원자력 발전소가 가진 잠재적 위협이 대선을 가름하는 결정타가 되리란 분석까지 나온다. 순조로운 승리가 예측되던 대선이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치열한 승부로 뒤바뀌고 만다.
이 에피소드는 여러모로 한국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가적 재난상황 가운데 명확한 책임을 자각하고 총책임자로서 위기에 대응하는 대통령 및 백악관 참모진과 연관 부서 관료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지켜보는 과정이 한국의 현대사에 거듭돼 온 재난과 국가의 대응실패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초반부, 바틀렛 대통령은 캘리포니아 주지사에게 전화를 연결해 주민들에게 대피령을 내릴 것을 명령한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현장으로부터 확실한 정보가 들어오지 않았단 걸 이유로 주저하는 주지사에게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속도로에서 접촉사고 좀 생기는 게 암을 가진 아이들이 태어나는 것보다는 낫다고 말이다. 정부 또한 연방비상사태를 선언하고 필요한 모든 것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리고 연방의 모든 관련 부서를 통제할 총책임자를 임명해야 하지 않느냐는 참모의 조언에 "내가 총책임자야"라는 답까지 내린다. 그는 이후 모든 상황을 직접 챙기며 어쩔 수 없는 실수와 그러나 선명한 리더십을 보여주는 것이다.
▲ 윤석열 대통령 창원 원전산업 협력업체를 방문한 모습 |
ⓒ 대통령실 |
원전 30%대 유지한다는 공약 앞에서
한국사회에서 이 드라마가 여전히 의미가 있는 이유는 위와 같다. 불행히도 우리는 많은 사회적 재난 앞에서 대통령 중심의 리더십을 갖지 못했다. 세월호 침몰참사가 그랬고, 이태원 참사 또한 그러했다. 재난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려는 이들 또한 득세하였고 그들로부터 극중 조쉬와 같은 고민을 찾아보기 어려웠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뿐만 아니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등 인류사에 커다란 해를 끼친 원자력 발전소는 한국의 주력 전력 생산시설 가운데 하나다. 원자력이 값싸고 안전하다는 걸 근거로 들며 보수세력은 꾸준히 그 필요를 제기해왔다. 그 결과가 어떠한가. 잠재적 위험성을 들어 29%까지 떨어진 원자력 발전소 에너지 생산 비율을 30%대로 다시 올려 유지하겠다는 후보가 대권을 잡고 대통령이 되기에 이른 것이다. 노후 원전의 폐로문제와 사용 후 핵폐기물 처리문제, 무엇보다 고려돼야 할 잠재적 위험 등은 고스란히 후대의 부담으로 남겨질 뿐이다.
2006년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중요한 소재로 삼은 <웨스트 윙>에 대해 잘만 활용되면 깨끗하고 안전한 설비에 대하여 위기감을 조장한다는 비판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5년 후 선진국인 일본에서 세계적 재난이라 해도 될 사고가 발생했다. 원전은 지진 등 재해나 전쟁, 관리부실 등 수많은 이유로 그 같은 재난을 초래할 수 있음을 만천하에 내보인 것이다.
<웨스트 윙>의 가장 큰 미덕은 흥미로운 극으로써 현실의 문제와 그에 대한 대처를 시청자에게 내보인다는 점에 있다. 소킨은 이와 관련하여 짝을 찾기 어려운 걸출한 작가이며, 그와 그가 이끄는 동료 작가들의 내공이 고스란히 깃든 이 드라마는 제작된 지 십 수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현실적 가치를 생생히 내보인다.
불행히도 오늘 한국의 정치인들에게선 이 드라마 속 인물들의 고민을 조금도 느껴볼 수 없다. 그 참담함이야말로 이 드라마가 어째서 여적 유효한가를 되새기게 한다. 떠난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수시로 이 드라마 시사회를 열어 참모들에게 보이려 한 데는 바로 이러한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닌가, 나는 그런 생각을 이르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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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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