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10년 안에 내전" 43%…1년전 경고 무섭다 '트럼프 카오스'
“그들이 천사라서가 아니다. 전직 대통령 기소가 불법이라서도 아니다. 미국 정치의 문민화를 유지하고 권력이 한 정당에서 다른 정당으로 평화롭게 넘어가도록 보장하기 위해서다.”
미국 연방검사 출신으로 조지 W. 부시 정부 때인 2005~2009년 국토안보부 정책차관보를 지낸 폴 로젠즈웨이그가 지난해 7월 미 애틀랜틱지 기고문에서 전ㆍ현직 대통령을 사법적으로 단죄하지 않는 미국의 오랜 관행에 대해 한 얘기다. 1776년 건국 이래 약 250년 동안 유지돼 온 이 ‘아메리칸 스탠더드’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형사 기소로 깨지면서 미국이 급속히 ‘트럼프발 카오스’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친트럼프와 반트럼프 사이를 찢어놓은 분열과 반목 때문이다.
지난 4일(현지시간)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인 기소인부(認否)절차가 진행된 뉴욕 맨해튼 형사법원 앞 커넥트폰드 공원은 짙게 드리워진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보여주는 듯했다. 한쪽에선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선 구호인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로고가 박힌 모자나 티셔츠를 입은 트럼프 지지자들이 “트럼프는 무죄” 등을 외치며 기소 항의 집회를 벌였다. 다른 쪽에선 트럼프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누구도 법 위에 있지 않다’고 적힌 손팻말을 흔들며 “트럼프를 구속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일부 시위대는 욕설과 고함을 주고 받기도 했다. 사건의 실체적 진실이 가려지기도 전에 불붙은 ‘두쪽 민심’의 싸움이었다.
‘두 개의 미국’은 여론조사 수치로도 알 수 있다. 지난 3일 발표된 미 CNN 방송 여론조사에서 트럼프 기소를 놓고 민주당 지지층은 ‘잘한 일’이라는 응답이 94%로 압도적인 반면 공화당 지지층에선 ‘잘못된 기소’라는 쪽에 79%가 몰렸다. 미국 사회는 누구든 법 앞에 평등하다는 미 독립혁명의 기본 이념과 엄격한 법치주의 확립이란 관점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라는 인식과 타협ㆍ절충이라는 정치의 영역이 사법화되는 데 대한 부정적 인식이 혼재하고 있다. 이 역시 여론조사 결과에 드러난다. CNN 조사에서 트럼프 기소가 미국 민주주의에 미칠 영향에 대해 ‘긍정적’(31%)이란 쪽과 ‘부정적’(31%)이란 쪽이 절묘하게 같았다.
미국 내 진보와 보수 진영 간 균열은 최근 몇 년 새 더욱 심화됐다. 낙태권이나 총기 규제, 성 소수자 권리 등 예민한 이슈마다 민주당과 공화당 지지자들은 대립각을 세웠다. 임신 6개월 전까지는 보편적 낙태권을 보장했던 ‘로 대(對) 웨이드’(Roe vs Wade) 판례를 연방대법원이 지난해 6월 49년 만에 폐기하면서 보수와 진보 진영이 충돌할 때는 “(미 합중국이 아닌) 미 분열국(the Disunited States of America)이 되고 있다”(미 뉴욕타임스ㆍNYT)는 우려마저 제기됐다. 당시 ‘10년 안에 내전(Civil War)이 발생할 것’에 응답자 43%가 동의하기도 했다(미 비즈니스 인사이더 여론조사).
특히 트럼프 전 대통령 재임 기간 분열의 상처가 깊어졌다는 데 이견이 없다. 백인 중심의 ‘아메리카 퍼스트’ 구호 아래 흑인 등 유색인종과 소수민족을 자극해 갈등을 키웠고 자신에게 비판적인 NYTㆍCNN 등 주류 언론을 ‘가짜뉴스 양성소’로 몰아붙이며 여론 대립을 조장했다. 무엇보다 2020년 대선 패배를 부정하고 추종자들의 1ㆍ6 의사당 난입 사태를 배후에서 부추긴 전대미문의 혐의는 미국 민주주의 퇴행을 촉발했다는 비판을 불렀다. 이런 흐름 속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이 포르노 배우에게 입막음 돈을 주고 회사 영업 기록을 위조하는 등 34개 혐의로 기소된 것은 기름을 붓는 격이 됐다.
미국 민주주의 역사를 새로 쓰게 한 이번 기소는 몇 가지 중대한 화두를 던졌다. 먼저 1789년 선거를 통해 대통령(당시 조지 워싱턴 대통령)을 선출한 이래 세계 최초로 대통령제를 창안해낸 민주주의 수호 국가라는 오랜 자부심이 무너졌다는 점이다. 서정건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미국은 전ㆍ현직 대통령을 법정에 세우고 감옥에 보내는 것은 민주주의가 성숙하지 못한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이란 인식이 은연중 깔려 있었다”며 “그런데 이번 일로 그게 깨지면서 큰 혼란에 직면한 듯하다”고 말했다.
트럼프 기소 이후 제기되고 있는 또다른 논란거리는 ‘허시 머니’(Hush Moneyㆍ입막음 돈) 사건이 과연 미국의 ‘전ㆍ현직 대통령 불기소’ 관행을 깨야 했을 만큼 중대 사안이었느냐 하는 점이다. 반트럼프 성향을 보였던 미 NYT나 워싱턴포스트(WP) 등 주류 언론에서도 이에 대한 문제 제기가 나온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첫 기소치고는 공소사실이 약하고 결정적 한 방이 안 보인다는 얘기다. WP는 최근 “이번 기소는 트럼프가 받는 혐의 중 가장 설득력이 떨어진다. 전직 대통령 기소 건으로는 빈약한 케이스”라고 지적했다. 트럼프를 옥죄고 있는 검찰과 특검의 수사 중 1ㆍ6 의사당 난입 선동 의혹이나 2020년 대선 때 석패한 조지아주의 국무장관에게 “선거 결과를 뒤집기 위한 1만1780표를 찾아내라”고 압박했다는 의혹 등은 민주주의의 근간을 위협할 수 있는 사안이라는 점과 대비된다. 이와 관련해 서정건 교수는 “중대 범죄로 보기는 힘든 허시 머니 사건으로 전직 대통령을 기소해 미국 정치에 없던 일이 벌어진 건 트럼프 지지 여부를 떠나 큰 불행이라는 여론이 많은 듯하다”고 말했다.
문제는 전ㆍ현직 국가 수반의 단죄가 정치적 공격으로 간주돼 정치 보복의 악순환을 가져올 가능성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미 이번 기소에 ‘정치적 박해’ ‘마녀사냥’ 프레임을 씌우며 여론전을 강화하고 있다. 기소인부절차를 위해 법정에 선 당일인 4일 오후 기자회견을 열어 이번 기소를 “엄청난 선거 개입”으로 규정하고 혐의를 전면 부정했던 그는 다음날인 5일에도 대정부 공세를 이어갔다. 그는 소셜미디어 글을 통해 “민주당은 법 집행을 완전히 무기화해 우리 선거를 방해하는 와중에도 악랄한 권력 남용을 통해 개입하고 있다”고 공격했다.
‘세기의 재판’으로 불린 트럼프 전 대통령의 법정 다툼은 내년 초에나 본격화될 전망이다. NYT는 5일 “아무리 빨라도 공판이 열리는 시점은 내년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도했다. 전국에서 가장 먼저 치러져 ‘대선 바로미터’라고 하는 공화당의 아이오와 대선 코커스(당원대회)는 내년 2월 5일 예정돼 있다. 트럼프의 전략대로 이번 기소 건이 2024년 대선을 관통하는 이슈가 될 가능성이 커졌다는 뜻이다.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 구도에는 지지층 결집으로 트럼프에게 호재가 될 가능성이 있지만 대선 본선에서 중도층 등의 이탈을 부를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김형구 기자 kim.hyoungg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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