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땐 소금단식까지 불렀다…대통령 최후수단 '거부권' 후폭풍
“배신의 정치를 반드시 심판해달라.”
2015년 6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여·야가 합의한 ‘국회법 개정안’에 거부권(재의요구권)을 행사하며 했던 말이다. 당시 여당(새누리당, 국민의힘 전신)의 원내대표인 유승민 전 의원을 겨냥한 말로 해석되며 정치권에 후폭풍이 휘몰아쳤다.
거부권은 헌법이 보장한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나, 정치적으론 ‘최후의 수단’으로 여겨져왔다. 다수의 의원이 찬성해 통과시킨 법안을 사실상 무효화 하는 것이라 “국회와 행정부 사이의 어떠한 타협도 불가능한 최고조의 갈등 상황”(최진 대통령 리더십연구원장)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4일 양곡관리법에 거부권을 행사하자 정국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윤 대통령과 야당의 정면충돌도 사실상 정해진 수순으로 보인다. 전례를 보면 대통령의 거부권이 여당 내 균열을 가져오는 ‘나비효과’를 일으킨 경우도 있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부터 윤 대통령까지 역대 대통령은 총 67차례 거부권을 행사했다. ‘최후의 수단’이라 불리기엔 언뜻 많아 보이지만, 이승만 전 대통령 홀로 45차례 거부권을 행사한 측면이 컸다.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된 노태우 전 대통령 이후로 좁혀보면 숫자는 줄어든다. 노태우 전 대통령 7건, 노무현 전 대통령 6건, 이명박(MB) 전 대통령 1건, 박근혜 전 대통령 2건, 윤석열 대통령 1건 등 17건 정도다.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문재인 전 대통령은 거부권을 한 차례도 행사하지 않았다.
거부권은 주로 ‘여소야대’ 상황인 분점 정부에서 사용됐다. 특히 여당인 열린우리당의 의석이 47석(11.3%)에 불과했던 노무현 정부 초기 16대 국회에서 거부권을 둘러싼 갈등이 가장 극심했다.
대표적 사례가 2003년 한나라당 등 야당이 주도한 ‘노 전 대통령 측근 비리 특검법’에 대한 노 전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다. 국회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 압도적 표결로 넘어온 법안이었지만 노 전 대통령은 “검찰 수사권이 다수당의 횡포에서 보호돼야 한다”며 특검법을 거부했다. 당시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 최병렬 대표는 이에 반발해 열흘간 물과 소금만 먹는 단식 농성에 돌입했고 결국 병원 신세를 졌다. 대통령이 거부한 법안은 국회에서 다시 투표해 재적의원 과반수 출석과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법률로 확정된다. 당시 압도적 의석을 보유했던 야당은 특검법을 재의결했다.
MB는 임기를 약 한 달가량 앞둔 2013년 1월 첫 거부권을 행사했다. 노 전 대통령과 달리 여당이 다수당이었고, 같은 당 소속인 박근혜 전 대통령이 당선인 신분이던 이례적 시점이었다. 당시 여·야는 대선 기간 택시 기사의 표를 의식해 택시를 대중교통에 포함해 정부 지원을 받도록 하는 ‘택시법’을 통과시켰다. MB는 ‘포퓰리즘 법안이라며 청와대를 떠나기 직전 거부권을 행사했다. 당선인 신분이던 박 전 대통령도 법안에 신중했던 터라 큰 파장은 없었다. 오히려 정치권에선 “MB가 박 전 대통령 대신 비판을 떠안고 거부권을 쓴 것”이란 반응이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다른 정부 때와 달리 거부권을 놓고 여당과 갈등을 벌였다. 박 전 대통령은 2015년 19대 국회 당시 비박계로 분류되던 김무성 당시 새누리당 대표와 유승민 원내대표가 야당과 합의한 국회법 개정안을 문제 삼았다. 국회에 정부 시행령에 대한 수정요청권을 부여한 것이 골자였는데, 박 전 대통령은 “행정 업무를 마비시키고 국가 위기를 자초한다”며 야당보다 여당을 더 매섭게 비판했다. 국무회의 중에“신뢰를 어기는 배신의 정치는 패권주의와 줄 세우기 정치를 양산한다”“반드시 국민께서 심판해주셔야 한다”는 작심 발언도 쏟아냈다. 결국 유승민 전 의원은 원내대표에서 물러났지만, 여당은 내부 갈등 끝에 총선에서 참패했다.
엄경영 시대정신연구소장은 “내년 총선을 앞두고 야당은 논쟁적 법안을 밀어붙이고 윤 대통령은 계속 거부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크다”며 “양측 모두 국민들에게 서로를 심판해달라고 외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박태인 기자 park.ta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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