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 디아스포라를 심는 사람들
인천 중구 한국이민사박물관에 들어서면 특별한 전시물이 눈길을 끈다. ‘코리아 디아스포라의 귀향’이라는 제목의 작품으로, 여기엔 깨알 같은 글씨로 7415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의 보관 문서에 수록된 승객 명단인데 1903년 1월 13일부터 1905년 8월 8일까지 총 64차례에 걸쳐 태평양을 건너갔던 이들로 우리나라 이민 1세대들이다.
현재 전 세계에 퍼져 있는 한인 디아스포라는 약 700만명을 헤아리고 있으니 지난 120년 동안 1000배나 늘어난 셈이다. 이산(離散·흩어짐) 또는 파종(播種·씨뿌림)을 뜻하는 디아스포라는 원래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유대교의 규범과 생활 관습을 따르는 유대인을 지칭했다. 요즘은 그 의미가 확장되면서 본토를 떠나 타지에서 살아가는 공동체로 통용된다. 우리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이나 탈북민, 나아가 난민 공동체들도 이 부류에 속할 것이다.
미국에선 뉴욕이 디아스포라 공동체 터전의 상징이라면 한국에선 경기도 안산이 꼽힐 만하다. 전 세계 100여개국 출신 이주민들이 모여 있는 ‘작은 지구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거주자로 등록된 외국인만 10만명에 가깝다. 안산 주민 7명 중 1명 꼴이다. 안산이 이주노동자들의 공동체로 알려진 데는 박천응 안산이주민센터 대표의 헌신을 빼놓고 얘기하기 힘들다. 그가 이주노동자 사역에 뛰어든 건 1992년 안산의 공중전화 부스에서 만난 외국인 노동자와의 인연이 계기가 됐다.
당시 한국인과 통화 중이었던 외국인 노동자는 박 대표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단다. 박 목사는 그날 밤 ‘내가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야 하느냐’는 물음이 계속 머리를 맴돌았고, 외국인 노동자가 건넨 질문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으로 받아들이면서 이주민 사역에 몸을 던졌다.
30년 가까이 이주민들과 부대끼면서 그는 ‘국경없는 마을 축제’를 개최하고, 이주민 여성과 중국동포 노인을 위한 상담소를 만들어 그들의 상처를 보살폈다. 아시아 이주 노동자와 한국인 부부의 자녀를 일컫는 ‘코시안’이란 가치중립적 용어를 만들어 보급하기도 했다. 그가 지금까지 해오고 있는 일은 이주민 디아스포라 공동체들이 저마다 잘 굴러가도록 돕는 윤활유 같다고나 할까.
안산에 박 대표가 있다면 서울 광장동에는 유해근 나섬공동체 대표가 있다. ‘노고니 아론드로숨’. 20년 전쯤 한국 땅을 밟은 몽골인들은 다른 건 몰라도 이 말은 꼭 외우고 다녀야 했다. ‘지하철 2호선 강변역에 있는 교회’를 뜻하는 몽골어인데, 당시 유 대표가 맡고 있던 서울외국인근로자선교회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무슨 문제가 생겨 이곳에 가면 ‘만능키’처럼 해결이 됐기에 몽골인들에게 이곳은 마음의 안식처이자 상담소이며 병원인 동시에 휴게실 같은 곳이었다.
이 일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유 대표는 몽골학교에 이어 지난해 베트남학교까지 열면서 이주노동자 자녀들의 백년대계까지 내다보고 있다. 시각 장애인인 그의 선견지명이 돋보이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사역 역시 이주민 디아스포라 공동체를 지탱해주는 든든한 버팀목 같다고나 할까.
박 대표나 유 대표 모두 목사라는 건 아는 사람은 다 안다. 동시에 30년 가까이 이어오고 있는 이들의 일, 즉 이주민 디아스포라 사역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체감하고 있을까. 200만명 정도인 국내 체류 외국인 수는 2~3년 안에 300만명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본보 취재 결과, 제3국에서 대기 중인 탈북자들의 한국행 대기 인원은 5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지난 3년간 코로나 팬데믹으로 잠시 한국에 둥지를 트는 디아스포라의 행렬이 잠시 주춤했을 뿐이다. 팀 켈러 목사가 탈기독교 사회에서 추구해야 할 교회의 모습 중 하나로 ‘다민족 교회를 세우는 공동체’를 꼽은 것은 놀라운 통찰력이다. 지금 서 있는 이곳에서 디아스포라를 심는 일이 곧 우리의 사명으로 읽힌다.
박재찬 종교부장 jeep@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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