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지만, 아무도 말할 수 없었던 '제주 4·3 사건'의 진실
[이준목 기자]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 진실을 찾으려는 사람들의 노력이 계속될 때 역사는 흘러간 과거가 아니라, 살아 숨 쉬는 현재이자 미래가 된다. 4월 6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에서는 '백골시신과 시멘트-1948, 사라진 사람들' 편을 통하여 한국 근현대사의 가슴아픈 비극인 '제주 4.3'의 진실을 조명했다.
1991년 크리스마스를 불과 3일 앞둔 제주도, 월랑봉(다랑쉬 오름) 인근. 당시 24세였던 김은희씨와 탐사대 일행은 억새밭을 헤치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탐사대 일원인 김동만씨는 한 동굴을 발견했고 그 안에서는 놀랍게도 백골이 된 시신들이 굴을 가득 메울 정도로 가득차 있었다. 백골들의 정체는 무엇이며 그들은 왜 그곳에 모여 있었던 것일까.
이야기는 1947년의 제주도로 거슬러 올라간다. 3.1절 기념행사를 위하여 3만 명이 넘는 제주도민들이 모이며 성황을 이뤘다. 그런데 한 아이가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치여서 다치는 사고가 벌어진다. 하지만 해당 경찰은 사고를 내고도 그 자리를 그냥 떠나버렸고 주민들은 경찰이 뺑소니를 치고 달아난 데 분노했다.
비극의 예고편
항의를 하러 군중들이 모여들자 위협을 느낀 경찰은 충격적이게도 민간인들에게 발포를 지시한다. 이 사건으로 8명이 부상을 당하고 6명이 사망했다. 피해자들은 모두 기념행사를 보러온 평범한 도민들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은 불과 1년 뒤에 벌어질 더 큰 비극의 예고편일 뿐이었다.
당시 한반도는 미소군정기로 광복 이후 미국과 소련이 남북한을 나누어 점령하여 통치하고 있었다. 제주도는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까워 일제강점기에 더 큰 탄압을 받았던 지역이었다. 미군정은 행정 편의를 위하여 친일 경력의 경찰들을 다소 고용했다. 이런 상황에서 경찰의 손에 무고한 민간인들이 살해당하는 사태가 벌어졌으니 제주도민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한 장면. |
ⓒ SBS |
공권력의 뻔뻔한 태도에 제주의 민심은 폭발했다. "사람을 죽인 경찰은 사과하라"고 외치며 당시 제주도 내는 총파업에 돌입했고 기관과 학교, 회사 등 무려 95%가 참여했다. 경찰은 총파업에 참여한 2500여 명을 검거하며 강경 대응에 나섰다.
1948년 4월 3일, 이미 살얼음판을 걷던 제주에서 화약고에 불을 붙이는 사건이 벌어진다. 좌익 무장대가 경찰청을 습격하여 다수의 경찰관과 우익인사 및 그 가족들이 사망했다. 이러한 제주의 상황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사람이 당시 유력한 대통령 후보 이승만이었다.
당시는 5.10 총선거를 앞둔 시점이었다. 이승만은 미군정의 지원을 받아 남한 단독정부를 세울 것을 주장해온 반면, 일부 민족지도자들은 이에 반대하며 국론이 갈린 상황이었다. 이승만의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총선거의 결과가 매우 중요했다. 제주도에서는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에 반대하는 여론이 강했고, 도민들은 산으로 향하며 투표를 보이콧했다. 총선거는 강행되었지만 과반투표율을 넘지 못하는 지역이 모두 제주도에서 나왔다.
이승만과 미군정은 이러한 제주도를 탐탁치 않게 바라보며 경계했다. 이승만 측은 "제주도는 빨갱이 섬이다"라고 비난했고 미군정은 구축함을 보내 제주 해안선을 봉쇄한 데 이어 육지에서는 수백명의 응원 경찰관과 군대를 파견하며 전시 분위기에 돌입했다. 바로 제주 4.3 사건의 시작이었다.
그 무렵 제주도에서 인사처럼 퍼지기 시작한 것이 "쉿, 속솜허라이!(조용히해라)"는 말이었다. 함복순씨는 6살이던 시절, 14살 차이가 나던 오빠 명립씨가 창고 위 다락에 숨는 모습을 지켜봤다. 엄마는 어린 복순씨에게 "오빠를 봤다고도, 숨었다고도 알리지마라"고 신신당부한다. 복순씨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제주도의 젊은 남자들은 폭도와 빨갱이로 몰려서 죽임을 당했다. 살아서 산으로 달아난 사람들도 '산폭도'라는 딱지가 붙어 남은 가족들이 대신 고초를 겪어야했다. 복순의 가족들은 명립씨를 숨겨서 보호하려고 했던 것.
하지만 그럼에도 복순의 가족들에게는 불행의 그림자가 닥쳐오기 시작한다. 집에서 은신하고 있던 명립씨가 갑자기 사라진다. 가족들은 명립씨가 경찰들에게 끌려간 것은 아닌지 노심초사했다. 아들의 행적을 수소문하던 복순씨의 아버지는 경찰서에 끌려가 잔혹한 폭행을 당한다.
▲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한 장면. |
ⓒ SBS |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은 곧바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제주도를 포위했다. 이승만 정권은 제주도에 군경 외에도 반공 극우 단체인 '서북청년단'을 대거 투입했다. 이들은 공산당에 의하여 쫓겨나 남쪽으로 내려온 이북 출신 청년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좌익에 대한 적개심이 누구보다 강했다.
이승만은 서북청년단을 신원이 가장 확실한 사람들이라고 신뢰하며 "저 남쪽 끝 섬에 빨갱이들이 있다"며 토벌에 참여할 것을 지시한다. 아들을 찾으러 나갔던 복순의 어머니는 서북청년단에게 살해당했다. 서북청년단은 '대살'이라는 명목으로 빨갱이나 폭도로 낙인찍힌 이들의 가족들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복순의 집도 서북청년단으로 추정되는 방화를 당했지만 복순과 아버지는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다행히 구조되어 목숨을 건질수 있었다.
참변은 제주도 곳곳에서 벌어졌다. 고광치씨의 가족들은 피난을 가다가 토벌대에 발각되어 아직 어린 광언-광치 형제를 제외한 조부모와 부모들이 모두 살해당했다.
당시 4살이라 아무 것도 몰랐던 광언씨는 훗날 4세 연상의 형 광치씨(현재는 작고)로부터 "가족들이 숨어있었는데 네가 우는 바람에 발각되어 어른들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뒤늦게 전해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그때의 트라우마로 가슴속에 한이 맺힌 광치씨는 늘 동생을 원망했다고. 광언씨 역시 기억도 나지않은 어린 시절의 실수 때문에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 제주도에서는 사망자가 나오지 않은 마을이 없을만큼 살벌한 전시 상태였다. 제주도에서 1947년부터 시작된 학살은 한국전쟁이 지난 1954년까지 무려 7년 7개월이나 이어졌다. 공식집계된 피해자만 1만 5천 명, 실제로는 3만 명 이상이 희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토벌대가 제주도민들에게 저지른 학살의 잔혹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갓 출산한 여성을 끌어다가 발가벗겨서 마을 여성들에게 본보기로 대리 살인을 강요하는가 하면, 여성의 갓난아기마저도 얼굴에 총을 쏴서 살해했다. 한 생존자는 어머니가 몸으로 자신을 보호하려다가 토벌대의 총에 맞고 온몸이 어머니의 피로 범벅이 되었던 끔찍한 순간을 회상했다.
큰 피바람이 지나가고 난뒤, 복순씨와 광언-광치씨같은 생존자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제주도민들에겐 그날의 기억은 꺼내지 않는 것이 일종의 금기가 됐다. 극단적인 반공과 서슬퍼런 연좌제가 지배하던 사회 분위기에서 어떤 보복을 당할지 알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제주도민들에게 4.3은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됐다.
▲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한 장면. |
ⓒ SBS |
시간은 다시 1990년대로 돌아온다. 유골을 발굴해낸 김은희씨와 탐사대 일행은 바로 4.3 연구소 소속의 연구원들이었다. 당시 캠코더로 현장을 직접 촬영한 은희씨는 유골들이 4.3과 관련된 인물들임을 직감했다.
탐사대는 동굴 내에서 미스터리한 흔적들을 잇달아 발견해냈다. 당시 동굴에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생활했던 흔적이 있었고, 유골들은 생전의 모습이 연상될 만큼 줄지어서 나란히 질서정연하게 누워있었다. 탐사대는 희생자들이 혹시 집단 자살을 한 것은 아닐까 추측하기도 했다.
당시 김종민 <제민일보> 기자는 인근 동굴에서 살았다는 제주도민 채정옥 할아버지을 만나 제보를 듣게 된다. 김 기자와 4.3 연구소 사람들이 들은 진실은 충격적이었다.
희생자들은 모두 종달리와 인근의 평범한 주민들이었다. 이들은 4·3 사건 이후 토벌대의 탄압과 학살을 피하여 어쩔 수 없이 산으로 숨어든 사람들이었다.
토벌대는 처음엔 굴안으로 총을 쏴대며 위헙했으나 주민들이 아무도 나오지 않자 아예 굴을 막고 산에 불을 질렀다. 피난처에 숨어었던 주민들은 입구가 돌로 막히면서 불길 속에 갇혀 죽어가야 했다.
당시 시신들은 입구 벽쪽에 몰려 있었고 돌 구석이나 땅속에 코를 파묻은 상태였으며 눈코입에서는 피가 흘러나왔다고 한다. 희생자들이 숨을 쉬지 못하고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며 괴롭게 죽어갔음을 보여주는 안타까운 장면이다.
당시 간신히 화를 피한 채 할아버지는, 토벌대가 떠난 후 참혹한 광경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서 시신을 수습했다. 시신을 하나하나 가지런히 눕히고 번호와 이름을 기록하며 역사의 증거를 남겨놓았다고.
1997년 인터뷰에서 채 할아버지는 "제주 4·3사건 이후 종달리에는 서북청년단이나 군경이 수시로 찾아와 젊은 사람들을 괴롭혔다"고 회상하며 "사람들은 '여기서는 죽는다' 싶었지만 계엄령 때문에 육지나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없으니 피할 곳은 결국 산밖에 없었다. 다랑쉬굴 사람들도 그 굴속에 있다가 토벌대를 만나게 된 것이다. 내가 알기로 그들은 4·3과는 전혀 무관한 사람들이었다"라고 증언했다.
다랑쉬굴에서는 복순씨의 오빠 명립씨, 광언-광치 형제의 부모님 유해도 발견됐다. 1992년 다랑쉬굴 유해 발굴 소식이 전해지며 오랫동안 묻혔던 제주 4·3 사건의 진실도 세상에 드러나게 됐다.
명립씨는 경찰의 추적을 피해 산으로 도주했다가 다랑쉬굴 피난처까지 오게된 것. 종달리 복순이네에서 다랑쉬굴까지는 불과 12Km거리였다. 복순씨는 40년간 행적도 모르고 그리워했던 오빠가 바로 지척에 있었다는 사실을 전해듣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또한 당시 직업군인으로 30년째 복무중이던 광언씨는 군인들이 자신의 가족들을 죽였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전역을 6개월 남겨놓은 상황에서 스스로 군복을 벗어버렸다.
하지만 당시 관련자들은 제주 4·3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는 것을 은폐하려 했다. 유족들은 유해 수습과 진상조사를 원했지만, 상부에서 모종의 압력으로 다랑쉬굴 입구는 시멘트로 봉쇄됐고 유골은 화장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일방적인 졸속처리로 행정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유족들의 의견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긴 세월 동안 빨갱이 가족 취급을 받으며 살아온 유족들은 어떤 항의도 하지 못한 채 가족들을 떠나보내며 또다시 무기력함에 빠져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랑쉬굴 유해발굴은 44년간 베일에 가려져 있던 제주 4·3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중요한 기폭제가 됐다. 그로부터 7년 만인 1999년 최초로 ' 4·3 특별법이 통과되며 제주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가 이뤄질 수 있게 됐다. 2003년에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원수로는 최초로 국가 권력의 불법적 행사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며 공식 사과했다. 제주 4·3 사건이 일어난 지 무려 56년 만이었다.
그 당시 수많은 제주도민들이 함께 눈물을 흘렸다. 희생자와 유족들에게는 그간의 오명을 벗어나 당당하게 역사 앞에서 세상의 빛을 받을 수 있게 되는 순간이었다. "평생 산폭도라는 이야기를 듣다가 이제는 '희생자'라고 해주니, 그것만으로 오빠의 한을 풀어서 만족한다"는 유족 복순씨의 이야기는 가슴을 울린다.
제주 4·3 평화공원은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방문하는 제주의 성지가 됐다. 보수와 진보 정권을 떠나 역대 대통령들도 제주 4·3의 가치와 의미를 인정하는 역사로 거듭났다.
하지만 아직 해결되지 못한 과제들도 남아 있다. 당시 행방불명되어 아직 유골도 찾지 못한 피해자들, 불법 재판을 받고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희생자들, 평생을 고통에 시달렸던 유족들에게 제주 4·3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사건이다.
제주도는 오늘날 전세계가 사랑하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관광지이자 아름다운 평화의 섬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그 땅 위에서 가슴아픈 비극이 존재했다는 사실, 왜 그런 비극이 벌어졌는가라는 성찰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몫으로 남겨졌다. 어두운 시대에도 진실을 밝히기 위하여 애썼던 누군가의 작은 노력들이 모여 제주 4·3 사건이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처럼, 역사는 모두가 함께 만들어나가는 사람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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