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봐도 '길복순'이 만족스럽지 않은 이유
[원종빈 기자]
▲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길복순> 포스터. |
ⓒ 넷플릭스 |
*이 기사에는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청부살인 업계 최고의 회사인 MK 엔터테인먼트 소속 킬러 길복순(전도연). 맡은 '작품'은 반드시 완수해 내는 에이스인 그녀에게는 한 가지 고민이 있다. 바로 소속사와의 재계약. 10대 딸 재영(김시아)을 제대로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워킹맘인 그녀는 결국 퇴사를 결심한다.
하지만 그녀는 재계약 제안을 섣불리 거절하지도 못한다. 청부살인의 모든 것을 알려준 멘토, 차민규(설경구) 대표와의 인연이 마음을 무겁게 하기 때문이다. 결국 답을 미룬 채 인턴 김영지(이연)를 데리고 마지막 작품에 들어간 복순. 모든 것이 순조롭던 그때, 임무에 숨겨진 진실을 발견한 그녀는 회사가 의뢰받은 일은 반드시 끝내야 한다는 규칙을 처음으로 어긴다. 바로 그 순간, 복순은 이제 모든 킬러의 타깃이 된다.
▲ 넷플릭스 <길복순> 스틸컷 |
ⓒ NETFLIX |
"액션이 많이 나오는 영화지만 액션 영화처럼 보이지 않았으면 하는 영화." 변성현 감독이 설명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길복순>이다. 이상한 말이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주인공 길복순은 청부살인업계 전설이다. 자연히 러닝타임 내내 액션이 쏟아진다. 길복순과 야쿠자의 일대일 결투가 시작이다. 블라디보스토크 술집에서, 길복순의 단골 식당에서도 화려한 액션이 이어진다. 그런데 어째서 <길복순>을 액션 영화로 보지 말라는 걸까?
영화가 끝나고 나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피비린내가 가득하고 비명과 총성이 끊이지 않지만, <길복순>은 분명 단순한 액션 영화가 아니다. 눈요기를 위한 액션, 쾌감을 위한 액션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품은 영화였다. <길복순> 속 액션은 워킹맘 길복순의 고민과 변화를 보여주는 장치였다.
안타깝게도 변성현 감독의 야심은 제대로 구현되지 않았다. 다양한 잠재력이 보이지만, 무엇 하나 살지 못했다. 신파가 아닌 방식으로 풀어낸 모녀의 이야기는 색달랐다. 워킹맘을 킬러에 빗대어 일상 속 딜레마를 시각적으로 펼쳐 보인 아이디어도 신선했다. 그러나 둘 다 깊지 않다. 길복순의 서사를 함축한 액션이 부족한 깊이를 더하는 듯 보이나, 조악하다. 새로운 스타일을 보여주고 싶다는 욕심이 넘친 나머지 무엇 하나 제대로 그려내지 못했다. 기시감으로 가득하다. 결국 <길복순>은 액션 영화라 해도, 아니라 해도 불만족스럽다.
킬러보다 흥미로운 '엄마 길복순'
<길복순>의 스토리는 크게 세 갈래로 나뉜다. 킬러 길복순의 직장 생활, 길복순과 차민규 대표의 재계약 협상, 그리고 복순과 재영 모녀의 갈등. 앞의 두 이야기는 새롭지 않다. 살인청부업자가 등장하는 영화라면 쉽게 예상할 수 있다. 냉혹하고 비정하나 최소한의 규칙이 있는 킬러들의 세계는 <존 윅>과 <킬 빌> 시리즈를 보는 듯하다. 연예 기획사 시스템을 본뜬 킬러 회사 구조가 한국의 맛을 살짝 더할 뿐이다. 길복순과 차 대표의 사제 관계도 익숙하다. 서로 아끼고 인정하지만, 언제든 죽일 수 있는 사이. 추구하는 가치 때문에 희생되는 사적인 애정. 킬러들의 이야기에 빠지지 않는 설정이다.
마지막 이야기는 눈에 띈다. 사실 모녀의 사정은 익숙하다. 워킹맘 복순은 딸 재영을 온전히 챙기지 못한다. 딸이 자기를 필요로 하는 순간 항상 출장을 가야 해서 미안해한다. 또 그녀는 딸이 어렵다. 방문을 쉽게 열지 못할 정도로. 담배를 피워도 제대로 혼내지 못할 만큼. 재영도 엄마가 어렵다. 직업조차 말하지 않는, 항상 비밀이 있는 엄마라서. 결국 둘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재영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로 협박하던 학교 친구에게 큰 상처를 입힌다. 하지만 엄마에게 쉽사리 진상을 밝히지 못한다. 동성애자라는 비밀을 털어놨을 때, 자기를 응원해 줄 거라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갈등을 풀어내는 방법이 재밌다. 답답하지 않다. 거슬리지도 않는다. 대신 독특하다. 신파는 찾아볼 수 없다. 그저 각자 비밀을 담담하게 꺼내 놓는다. 엄마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항상 오가는 직장 생활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딸은 소수자로서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이라고 속마음을 꺼내 놓는다. 고백만큼이나 응답도 쿨하다. 엄마는 딸의 선택을 조용히 응원한다. 딸도 엄마에게 고생했다고 말하며 방문을 열어 놓으라고 말한다. 그러고는 일상으로 되돌아간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응원하고 위로할 수 있을 뿐, 문제 해결은 각자 몫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이처럼 <길복순>은 애정 넘치는 모녀 사이를 눈물바다 없이도 감각적으로 뽑아내는 데 성공한다. 전형적인 킬러의 이야기보다 시원하고 맵시 있는 가족 이야기가 재밌는 이유다.
▲ 넷플릭스 <길복순> 스틸컷 |
ⓒ 넷플릭스 |
흥미롭게도, 스타일리시한 모녀 관계에 주목하면 평범한 킬러의 이야기도 조금은 달라 보인다. 복순과 오다 신이치로(황정민)가 대결하는 오프닝이 힌트다. 복순은 그에게 검을 들고 싸울 기회를 준다. 국무총리 아들의 대학교 부정입학 스캔들 뉴스를 보던 중 딸의 일침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럴 수도 있지'라는 복순에게 재영은 공정한 경쟁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아무리 목적이 중요해도 그 수단이 잘못되면 안 된다는 말이다. 물론 그녀가 딸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르지는 않는다. 대결이 불리하다 싶어지자 복순은 정정당당하게 싸우는 대신 오다를 총으로 쏴 죽인다.
하지만 복순은 이미 변했다. 주어진 작품의 동기나 배경을 신경 쓰지 않던 킬러는 이제 더 많은 것을 보고 듣는다. 흠잡을 데 없는 커리어우먼의 모습이 과연 엄마로서도 적절한지 의문을 품었기 때문이다. 모든 부모가 겪는 딜레마를 복순도 피하지 못한다. 단지 킬러라는 직업 때문에 유달리 핏빛일 뿐. 국무총리의 살인 의뢰는 전환점이다. 결국 복순은 살해 대상이 미성년자만 아니라면 반드시 의뢰를 성공시켜야 한다는 규칙을 처음으로 위반한다.
이처럼 가치관이 달라진 이상, 복순은 다른 킬러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다. 이 세계에서는 언제나 목적이 수단에 우선하므로. 일단 차민희(이솜)가 그녀 앞을 가로막는다. 길복순을 항상 눈엣가시로 생각했던 차 이사. 그녀는 복순을 죽이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아픈 아버지를 미끼 삼아 한희성(구교환)을 협박한다. 복순의 친구에게도 우정을 버리라고 제안한다. 그녀를 죽이면 MK 엔터로 스카우트하겠다면서. 멘토나 다름없는 차 대표와의 대립도 피할 수 없다. 그 역시 목적을 위해서라면 사사로운 인연은 포기할 수 있는 인물이니까. 그는 업계 탑이라는 MK 엔터 위상을 지키기 위해 자기 손으로 정한 원칙을 기꺼이 뒤엎어 버린다.
액션, 킬러와 엄마의 불완전한 가교
이때 액션은 달라진 복순의 내면을 극적으로 표출하기 위한 도구라 할 수 있다. 본래 그녀에게 살인 청부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액션은 군더더기가 없었다. 오다의 목숨을 총으로 간단히 빼앗는 것처럼. 영지에게 살해를 자살로 위장하는 방법을 알려줄 때도 사무적이었다. 살인을 하나의 능력으로 보고, 그 능력에 따라 킬러의 등급을 나누는 것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자기나 회사 이익을 위해 남들을 짓밟아야 할 필요도 있기 때문.
생각이 바뀌자 그녀의 액션도 변한다. 차 이사의 사주를 받아 자기 목숨을 노리는 희성과 다른 친구를 상대하는 복순의 표정은 이전과 사뭇 다르다. 승진과 성공이라는 목표 앞에 헌신짝처럼 버려진 우정과 애정. 그 순간 복순의 얼굴에는 일전에 찾아볼 수 없던 착잡함이 깃들어 있다. 차 이사를 노려보는 그녀의 눈빛이 분노로 차 있는 것처럼.
또 차 대표와의 일전을 앞둔 그녀의 얼굴은 안타까움과 긴장감, 그리고 살의로 가득하다. 인간적으로는 가장 신뢰하는 스승이 이제 정반대 가치를 추구하는 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길복순>의 액션은 캐릭터의 감정과 서사를 담아내려고 노력한다. 또 자칫 완전히 따로 놀 수 있는 킬러 길복순과 엄마 길복순의 세계도 하나로 이으려 한다.
하지만 <길복순> 속 액션은 제 역할을 다해내지 못했다. 난잡한 액션 스타일 때문에 액션에 담긴 이야기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러시아 술집이나 식당 장면은 매튜 본 감독의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 속 펍이나 교회 시퀀스를 보는 듯하다. 싸우기 전에 다음 상황을 머릿속으로 미리 시뮬레이션하는 장면은 <셜록 홈즈>나 <킹 아서> 등을 연출한 가이 리치 감독의 스타일을 빼닮았다. < 007 스카이폴 >처럼 화려한 조명 사이로 실루엣만 보이는 샘 멘데스 감독의 스타일도 중간중간 엿보인다. 그런데 이들이 한 시퀀스 안에 뒤엉켜 있고, 또 몇몇 장면에서는 합을 맞춘 티가 나다 보니 액션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 보통 한국 영화에서 보기 힘든 독특한 스타일이 인상적이지 않을 정도다.
이에 더해 작위적이고 노골적인 몇몇 대사와 추임새, 희성이나 신상사(김성오)처럼 등장은 강렬하나 허망하게 퇴장하는 몇몇 캐릭터도 문제를 악화한다. 결국 <길복순>은 액션 영화로 보든 아니든 아쉬움이 크다. 액션 영화라면 액션이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했고, 액션 영화가 아니라면 퀄리티가 부족한 액션 때문에 응축된 이야기를 들려주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흥미로운 아이디어와 신선한 도전이 엿보여서 더 아쉽기도 하다. 실망스러운 작품이 공개되는 경우가 생각보다 잦은 넷플릭스의 징크스를 충무로의 스타일리스트이자 기대주, 변성현 감독도 완전히 피하지는 못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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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https://blog.naver.com/potter1113)와 브런치(https://brunch.co.kr/@potter1113)에 게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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