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택 처형 10년인데…北, '장성택 조카사위' 영화서 지웠다

정영교 2023. 4. 7.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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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1990년대 후반 '고난의 행군' 시절 제작한 예술영화를 지난 1월에 다시 방영하면서 컴퓨터그래픽(CG)을 활용해 주연 배우의 얼굴을 다른 배우의 얼굴로 바꾼 사실이 확인됐다.

얼굴이 바꿔치기 된 배우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고모부인 장성택의 조카사위로 파악됐다. 김정은이 자신의 고모부를 '반당 반혁명 종파' 혐의로 처형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장성택의 흔적을 철저하게 지우려는 의도가 반영됐다는 해석이 나온다.

조선중앙TV가 지난 1월 2일 방영한 예술영화 '대홍단 책임비서' 제1부 '이깔나무'를 확인해보니 주연급 남자배우인 최웅철의 얼굴(위)이 컴퓨터그래픽(CG)으로 수정돼 다른 배우 박정택(아래)의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조선중앙TV 캡처, 연합뉴스

미국의 북한 전문매체인 NK뉴스는 지난 5일(현지시간) 이 같은 북한 언론·문학·예술 전문가인 타티아나 가브로센코 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의 분석을 소개했다.

매체에 따르면 북한 조선중앙TV는 지난 1월 2일 예술영화
「대홍단 책임비서」

의 제1부인 '이깔나무'를 방영했다. 조선예술영화촬영소에서 1997년부터 2001년까지 제작한 이 영화는 '고난의 행군' 시기 당에서 지시한 문제를 해결하는 북·중 접경지역 인근 양강도 대홍단군의 책임비서를 소재로 했다.

당초 이 영화의 주인공인 '장명우' 역할로 출연했던 배우는 장성택의 조카사위인 최웅철이었다. 그는 북한군 차수(왕별)를 지낸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의 맏형 장성우의 사위다. 그런데 지난 1월 방영된 영화에선 그의 얼굴이 모두 다른 공훈배우 박정택의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의도적으로 특정 인물의 얼굴 등을 영상에 합성하는 딥페이크(deep fake) 기술을 활용해 편집한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중앙TV가 지난 1월 2일 방영한 예술영화 '대홍단 책임비서' 제1부 '이깔나무'를 확인해보니 엔딩 크레딧에서 주연급 남자배우인 최웅철의 이름이 삭제되고 해당 배역에 다른 배우 박정택의 이름이 올라가 있다. 조선중앙TV 캡처, 연합뉴스

이와 관련해 가브로센코 교수도 "최웅철은 대홍단 책임비서에서 완전히 지워졌지만 그의 캐릭터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며 "새로운 배우 박정택은 원작의 대사를 그대로 읽고 같은 의상을 입은 채 다른 출연자와 연기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북한이 관영매체를 통해 이 영화를 방영한 것은 2012년 2월 8일 이후 11년여 만이다. 대북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은 2013년 장성택 처형 직후인 2014년 초부터 최웅철이 출연한 '곡절많은 운명'. '밀림이 설레인다' 등의 영화 25편에 대해 시청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강동완 동아대 교수는 "해외에서 만났던 김일성종합대학 출신의 유학생은 북한 당국이 장성택이 즐겨 부르던 '출발의 아침'과 같은 노래를 부르는 것조차 금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며 "김정은 유일 체계 확립을 위해 아직도 장성택의 흔적을 철저하게 지우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특히 '출발의 아침'이란 노래의 가사에는 '새출발'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하는데, 북한 당국이 이를 장성택이 최고지도자가 되어 새출발을 하자는 의도로 해석했다는 게 강 교수의 분석이다.

지난해 7월 조선기록과학영화촬영소 직원들이 완성된 기록영화의 편집본을 점검하는 모습. 노동신문은 "촬영소 일꾼들과 창작가들은 창작계획을 대담하게 세우고 자신들의 실무수준을 결정적으로 높이기 위한 사업을 적극 전개해나가고 있다"고 전했다. 뉴스1

북한은 이후 '대홍단책임비서'를 계속 방영하지 못하다가 이번에 딥페이크를 활용한 편집을 거쳐 주민들에게 선보인 것으로 보인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실제 일부 북한 전문 유튜브 채널도 북한이 2021년부터 최웅철이 출연한 영화에서 그의 얼굴을 박정택으로 바꿔 방영한 장면을 포착해 소개하고 있다.

앞서 북한 전문매체인 데일리 엔케이(Daily NK)는 2021년 7월에 북한이 노동당 선전선동부 직속으로 영상편집을 담당하는 기술부를 조직했다고 전한 바 있다. 매체에 따르면 조선기록과학영화촬영소에 자리 잡은 기술부는 약 140명이 소속돼 있으며, 김정은 체제에서 숙청·처형된 인사들이 등장하는 장면을 찾아내 최신 기술로 수정·편집하는 것이 주요 임무라고 한다.

정대진 원주 한라대 교수는 "사회주의 왕조국가인 북한의 통치스타일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라며 "모든 흔적을 철저히 지우는 동시에 새로운 영화를 제작할 여력이 없는 상황에서 선전선동을 위해 딥페이크로 가성비 좋게 기존 영화를 재활용하려는 측면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정영교 기자 chung.yeonggy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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