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의 근대화 뒤집기] 흑인노예 최초의 공화국, 독재 피바람에 묻힌 자유
영광과 고통의 땅, 아이티
아이티는 찬란한 역사를 가진 나라다. 인류 역사상 노예 반란으로 세워진 유일한 국가이고, 최초의 근대적 공화국 중 하나다. 그러나 이 역사는 영광보다 더 큰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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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혁명에 자극, 1804년 독립
노예 등 피지배층의 해방 내걸어
혁명 직후 백인·주민 대학살 비극
프랑스 승인 위해 300억달러 배상
잇단 쿠데타에 지진·태풍 재앙도
세계화시대, 과거와 화해는 무엇?
」
근대 세계를 들여다보는 창문
아이티는 근대세계사의 물결이 가장 격렬하게 솟구친 현장의 하나다. 근대세계의 모순이 생생하게 드러난 장면이 그 역사에 겹겹이 포개져 있어서, 그 나라의 역사를 넘어 근대세계사의 흐름을 살펴보는 좋은 창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청산되지 못한 과거가 사회를 억누르는 힘이 얼마나 큰 것인지 생생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789년 프랑스혁명 발발 당시 50여만 명으로 추정되던 생도밍그 인구는 세 개 계급으로 분류된다. 약 4만 명의 백인, 약 3만 명의 유색(자유)인, 그리고 90% 가까운 노예. 유색인은 혼혈인(물라토)과 해방흑인으로 구성되었다.
노예 중 현지 출생은 3분의 1이 안 되고 대다수는 아프리카에서 실려 왔다. 18세기 중 생도밍그의 노예 수입은 100만 명에 달했다. 그런데 1789년에 흑인 인구가 50만 명 이하였다는 사실은 높은 사망률을 말해준다. 노예의 생활조건을 개선하기보다 ‘죽을 놈’은 죽게 놔두고 더 많이 사 오는 것이 노예주에게 ‘경제적’ 선택이었다.
흑인도 ‘인간’이라 할 수 있나
1789년 8월 ‘만인의 자유와 평등’을 규정한 인권선언이 파리에서 나오고 1791년 8월 생도밍그 노예들이 자유와 평등을 향한 조직적 투쟁을 시작했다. 왜 2년이나 걸렸을까.
인간 이하의 상황에 놓여 있던 노예들은 자유고 평등이고 꿈도 꾸지 못하고 있었다. 본국의 혁명에 먼저 자극받은 것은 노예주와 노예의 중간 위치에 있던 유색인이었다. 그들은 보편적 자유와 평등이 아니라 자기네 자유와 자기네 평등(백인과의)을 늘리는 기회로 혁명을 받아들였다.
중간계층이 노예를 외면한 경향을 집단이기주의로 비난하는 것은 시대착오의 함정이다.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내세우는 시대였지만 정작 ‘인간’이 누구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았다. 당대의 진보적 사상가 중에도 흑인노예를 ‘인간’으로 인정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왕당파-혁명파의 대립, 유색인의 동요 등 어지러운 상황이 진행되는 가운데 노예들에게도 “우리는?” 하는 생각이 서서히 떠오른 것이다.
아이티혁명(1791~1804)의 의미를 널리 알린 책이 C L R 제임스(1901-89)의 『블랙 자코뱅』(1938)이다. 아이티 ‘국부(國父)’ 투생 루베르튀르(1743~1803)를 중심에 둔 책이다.
노예 출신의 지도자 루베르튀르
루베르튀르는 현지에서 노예로 태어났다가 자유를 얻은 사람이었다. 현지 출생 노예 ‘크레올’은 아프리카에서 실려 온 노예보다 지배자의 문화에 길들여 있어서 현장감독과 가사노동 등 비교적 중요한 역할을 맡다가 자유민으로 풀려나는 일이 많았다.
제임스가 루베르튀르를 ‘흑인 자코뱅’이라 부르는 것은 혁명이념에 투철했던 인물로 보기 때문이다. 50세 가까운 나이에 혁명을 맞은 루베르튀르는 지배계층 타도보다 실력 배양에 힘쓰고 파괴와 살상을 최소화하는 전략·전술을 꾸준히 택했다. 그리고 많은 혁명군 지도자들이 자기 소속집단(물라토, 해방노예, 크레올, 수입 노예)의 이해득실에 따라 움직인 것과 달리 광범한 피지배층 전체의 해방을 확실한 목표로 삼았다. 이런 태도가 ‘만인의 자유와 평등’ 이념에 부합하는 것으로 제임스는 해석했다.
1794년 2월 프랑스 혁명정부가 식민지까지 포함하는 노예제 전면 철폐를 선포하자 영국과 스페인에 의지해서 본국에 대항하던 반란군이 ‘자유와 평등의 프랑스’에 귀순해서 영국과 스페인을 물리쳤다. 그러나 1801년 생도밍그 혁명세력이 자치헌법 제정 등 독립성을 강화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나폴레옹이 대규모 병력을 파견해서 루베르튀르를 체포, 본국으로 압송했다. 이어진 독립전쟁에서 프랑스군이 패퇴한 후 1804년 1월 1일 아이티 독립이 선포되었다.
아이티 혁명사의 발굴과 재발굴
C L R 제임스는 카리브해의 다른 섬(영국령 트리니다드) 출신이다. 그가 아이티 혁명사를 쓴 것은 당시까지 민족주의 사관에 묶여 있던 아이티 역사에서 노예 해방운동의 주체성을 찾아 카리브해 지역 전체의 역사로 공유한 것이다.
그리고 근 60년이 지나 아이티혁명의 의미를 새로 밝히는 책이 나왔다. 미셸-롤프트루이요(1949~2012)의 『침묵에 묻히는 과거(Silencing the Past)』(1995)다. 아이티 출신으로 19세에 뒤발리에 독재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가 인류학자가 된 트루이요는 아이티 사회의 여러 성분이 역사 속에서 뒤얽히는 실제 모습을 그려냈다.
민족주의 사관에서는 ‘국민’으로, 사회주의 사관에서는 ‘민중’으로 뭉뚱그려졌던 사회 구성요소들을 분석함으로써 트루이요는 독립 후에도 계속된 아이티 역사의 비극성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역사의 짐이 될 과도한 폭력성의 원인이 어디에 있었던 것인가.
대표적 사례가 독립선언 직후 백인과 물라토 수천 명을 죽인 대학살이었다. 이 학살로 신생국 아이티는 국제사회의 외면을 받게 되었고 20년 후 고립을 못 견뎌 구걸하듯 프랑스의 승인을 받기 위해 막대한 배상금을 약속해야 했다. 아이티가 프랑스에게 배상금을 내야 한다니! 이 배상금은 오래도록 아이티의 멍에가 되었다.(애초의 1억5000만 프랑이 1838년에 9000만 프랑으로 조정되었지만 그 가치는 지금의 300억 달러에 달한다. 2003년 아이티 정부가 1943년까지 지불된 배상금을 반환하라며 210억 달러를 프랑스에 요구했으나 이듬해 아리스티드 대통령이 쿠데타로 축출된 후 이 요구를 취소했다. 2016년 프랑스 의회는 이 배상금의 근거가 되었던 1825년 조례를 폐기하는 상징적 조치를 취했다.)
‘황제’ 자처한 데살린의 학살
이 학살은 독립선언 후 황제가 된 장-자크 데살린의 소행이었다. 여러 해 동안 루베르튀르 휘하에서 활동한 데살린은 1802년 4월에 프랑스군 쪽으로 넘어갔고, 6월 루베르튀르 체포에 앞장서거나 협력했다는 의심을 받는다. 그리고 10월에 다시 항전으로 돌아서서 독립전쟁을 지휘하고 황제가 되었다. 변절과 배신에 대한 의심을 피하고 선명성을 과시하기 위해 무자비한 학살을 명령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따른다.
트루이요는 역사학계를 가리켜 ‘길드(guild)’란 말을 많이 쓴다. 내부 원리에 따라 행동양식이 결정되는 폐쇄적 조직이라는 뜻이다. 역사로부터 목소리를 빼앗는 힘이 사회의 여러 층위에서 여러 방향으로 일어나는 현상을 그는 지적하는데, 대다수 역사학자는 그 힘에 저항하기보다 그 하수인 노릇을 하는 것으로 그는 본다.
약으로 쓸 쓴소리로 받아들여야겠다. 사실 이 책은 미국에서 역사학 입문 교재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내용에 담긴 아이티 역사나 노예해방 역사에 앞서 역사학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많은 역사학 교수들이 환영하는 것이다.
지구 반대편에서 찾는 역사의 교훈
“역사는 승리자가 쓰는 것”이란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역사 쓰는 수단을 승리자가 가지니까. 집권세력이 민족주의에 쏠릴 때는 민족주의 사관이, 민중주의에 쏠릴 때는 민중주의 사관이 이용된다. 공격 대상을 찾는 손쉬운 역사관은 동어반복을 벗어나지 못한다. 트루이요는 아마 “역사는 생존자가 쓰는 것”이라고 고쳐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역사를 쓰는 것은 승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라고.
아이티는 부러워할 사람이 없는 나라다. 2010년의 끔찍한 대지진 외에도 태풍·유행병 등 재해가 끊임없는 데는 정치가 어지러운 탓도 있을 것이다. 1990년 ‘아이티 최초의 제대로 된 선거’로 당선된 아리스티드 대통령이 2004년 재차 축출된 후 안정된 정권이 다시 나타나지 않고 있다. 2021년 7월 암살당한 모이즈 대통령의 후임자조차 아직도 선출되지 못하고 있다.
지구 반대편의 이런 나라 역사에서 많은 교훈을 얻게 된 사실이 놀랍다. 일본과의 ‘화해’를 서두르는 한국인에게 아이티의 프랑스와의 1825년 ‘화해’는 어떤 가르침을 줄까. 제임스와 트루이요 같은 걸출한 학자들의 노력 덕분이기도 하지만, 대다수 인류가 비슷한 문제를 마주하게 하는 ‘세계화’의 힘을 새삼 절감한다.
김기협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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