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상의 라이프톡] 봄비 가늘어 방울 짓지 못하지만

오병상 2023. 4. 7.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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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가 내리던 지난 5일 서울 도심 경복궁을 찾은 관광객들이 우산을 쓴 채 경내를 걷고 있다. 장진영 기자


‘춘우세부적(春雨細不滴)’
봄을 노래한 문장으로 손꼽히는 다섯 글자다. ‘봄비 가늘어 방울조차 짓지 못한다’는 뜻이다. 고려 충신 정몽주가 남긴 ‘춘흥(春興)’이란 한시 첫 구절이다. 춘흥은 짧다. 5글자씩 4구절에 불과한 오언절구. 첫 구절이 백미. 이어지는 세 구절도 담백하다.
야중미유성(夜中微有聲 깊은 밤 희미한 소리 들리네)
설진남계창(雪盡南溪漲 눈 녹은 물 남쪽 계곡에 넘치니)
초아다소생(草笌多少生 새순은 얼마나 돋아나겠는가)
춘흥을 촉발한 건 봄비다. 빗줄기 가늘고 소리조차 희미하지만, 눈을 녹이고 초목을 소생시킨다. 자연의 섭리는 위대하지만 소란스럽지 않다.
지난 사흘 봄비에 ‘춘우세부적’이란 문장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강수량이 많았다지만 이번 봄비도 빗방울로 내리다가 곧 소리없는 보슬비와 잡히지 않는 는개로 이어졌다. 그래도 메마른 먼지바람에 넘실대는 산불을 일순간에 잠재웠다. 비로소 초록이 짙어질 산색을 맞이할 여유를 되찾게 해주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몽주의 시심에 공명하기에 오늘의 현실은 너무 척박하다. 봄비를 기다리는 마음이 올해만큼 간절한 적은 없었다. 최악의 가뭄과 산불 탓이다. 강수량이 반토막 난 남부의 가뭄, 전국적인 역대급 고온현상, 올해 산불건수(381건)가 이미 2021년 한해 발생건수(349건)를 넘어섰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번 봄비는 춘흥을 넘어 생명수처럼 느껴진다. 춘우세부적이라 넉넉하진 않지만 계곡에 물 흐르고 초목에 생기가 돈다. 꽃샘추위가 이어진다해도 봄날은 이미 왔다.

오병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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