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사찰, 한·미·북 입장 달랐다…92년 '한반도 비핵화' 실패 뒷얘기

정진우 2023. 4. 6.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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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월 14일 판문점 중립국 감독위에서 임동원 남측 대표(오른쪽)와 최우진 북측 대표가 '공동선언 문본'을 교환하며 남북은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에 합의했다. 연합뉴스

“남과 북은 한반도를 비핵화함으로써 핵전쟁 위험을 제거한다.”
남북은 1992년 2월 이 같은 내용의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을 통해 핵에너지를 평화적 목적으로만 이용한다는 데 합의했다. 북한은 ‘비핵화’의 선결 조건인 사찰에도 동의했다. 공동선언 4항에는 “상대측이 선정하고 쌍방이 합의하는 대상들에 대해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가 규정하는 절차와 방법으로 사찰을 실시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한·미 양국은 이 때까지만 해도 ‘핵 폐기→사찰→비핵화’의 프로세스를 통해 한반도 비핵화가 달성될 것이란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치열한 외교전 속 비핵화의 과정과 방법론을 둘러싼 남·북·미 3자의 입장은 미묘하게 어긋났다. 6일 기밀 해제된 외교문서에는 그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외교 전쟁의 흔적들이 담겼다. 정부는 매년 생산된 지 30년이 넘은 외교문서를 일반에 공개한다.


미국과의 수교 원한 北, ‘주한미군’ 용인 시사


제5차 남북 고위급 회담(1991년 12월 13일) 직후이자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 발효(1992년 2월 19일) 직전이었던 92년 1월 22일 북·미 고위급 회담이 전격 이뤄졌다. 미국 뉴욕의 유엔주재 미국대표부에서 열린 이 회담엔 당시 아널드 켄터 미 국무부 정무차관과 김용순 북한 노동당 국제부장의 회담이 참석했다. 한국전쟁 이후 북·미 간 첫 고위급 회담이었다.
1992년 당시 김용순 북한 국제부장은 미국 측에 주한미군 주둔을 용인하는 듯한 발언을 남겼다. 연합뉴스

이 자리에선 주한미군 주둔 문제가 의제에 올랐다. 당시 김용순 국제부장은 회담에서 주한미군 주둔을 용인하는 듯한 발언을 남겼다. 이와 관련 92년 3월 방한했던 당시 리처드 솔로몬 미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는 이상옥 외무부 장관에게 “북측이 주한미군의 존재를 ‘안정의 요소’로 인정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전했다.

북한이 주한미군 주둔을 용인하는 방향으로 태도를 바꾼 것은 미국과 수교를 맺기 위한 전략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미국의 태도는 단호했다. 북한이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에서 합의한 핵 사찰과 인권 개선이 선행돼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와 관련 92년 1월 리처드 솔로몬 차관보는 한국 측에 “북한이 IAEA 안전협정 서명 및 의무 이행시 미국은 북한과 뉴욕에서의 격상된 접촉을 계속할 것”이라면서도 “핵 개발, 재처리 증거가 포착되면 접촉을 즉각 중단할 것”이라는 입장을 전했다.


남북 ‘동시 사찰’ 둘러싼 동상이몽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의 핵심 조항인 ‘남북 동시 사찰’ 문제에서도 한·미의 셈법은 달랐다. 미국은 남북에 더해 미국이 사찰에 참여하는 ‘3자 사찰’에 무게를 실었다. 실제 공개된 외교문서에 따르면 92년 3월 솔로몬 미 국무부 차관보는 이상옥 외무부 장관에게 “미국이 대북한 사찰에 참여치 못하게 되면 형평이 맞지 않는다는 분위기가 미 행정부에 있다”고 말했다.
1991년 아세안확대외무장관회의에서 만난 이상옥(오른쪽) 당시 외무부 장관과 제임스 베이커 미 국무장관. 중앙포토

하지만 당시 노태우 정부의 입장은 달랐다.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에 명시된 사찰의 주체는 남북 양측이었고, 미국이 사찰에 참여할 경우 자칫 비핵화 협상이 북·미 위주로 진행돼 한국이 배제되는 상황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상옥 외무부 장관 역시 3자 사찰을 요청한 솔로몬 차관보에게 “3차 사찰 참여 문제는 계속 협의가 필요할 것”이라며 유보적 반응을 보였다.

미국의 사찰 참여를 둘러싼 한·미 이견 속 북한은 핵 사찰의 주체는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돼야 한다고 봤다. 북한 측은 92년 12월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IAEA 이사회에서 국제기구 총국장에게 “사찰을 받을 필요가 있다면 IAEA의 사찰을 받으면 되고, 한국을 비롯한 제3국의 사찰은 수용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북한은 심지어 군사기지에 대해선 ‘사찰 불가론’을 폈는데, 이는 한·미가 수용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팀 스피릿’ 재개에 北 NPT 탈퇴


한미는 1993년 팀스피리트 훈련을 재개했고, 북한은 즉각 반발하며 NPT를 탈퇴했다. 사진은 1993년 훈련 당시 우리나라에 처음 공개된 F117A 스텔스기. 중앙포토
한·미 연합 군사훈련인 팀 스피릿 훈련 재개는 한반도 비핵화 프로세스 중단의 트리거가 됐다. 당초 한·미는 92년 초까지만 해도 ‘훈련 중지’ 입장이었는데, 같은 해 10월 한·미 국방부 장관은 돌연 팀 스피릿 훈련 재개 방침을 발표했다. 북한이 IAEA에 플루토늄 보유량을 축소 신고하고, 은닉한 핵 시설 공개 요구를 거부한 데 따른 조치였다.

북한은 즉각 반발했다. 이번에 공개된 외교문서에는 92년 11월 미국 워싱턴 DC를 방문한 당시 허종 주유엔 북한 차석대사가 국무부의 한국과장을 만나 “팀 스피릿 훈련을 재고해달라”는 취지로 수차례 요청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하지만 한·미는 93년 2월 결국 팀 스피릿 훈련을 열었다. 한반도 비핵화 프로세스는 물론 남북-북·미 대화가 단절되는 순간이었다. 북한은 팀스피리트 훈련을 핑계 삼아 93년 3월 NPT를 탈퇴했고, 1차 북핵 위기가 시작됐다.


'모가디슈' 막전막후


영화 '모가디슈'에서 다룬 소말리아 남북 공관원 탈출 사건 당시의 상황이 이번에 공개된 외교문서에 담겼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한편 공개된 외교문서엔 영화 모가디슈(2021)로 유명해진 ‘소말리아 남북 공관원 탈출’ 당시의 상황이 고스란히 담겼다. 91년 1월 9일 당시 강신성 주소말리아대사를 비롯한 대사관 직원들은 교신 오류로 구조기에 탑승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였다. 당시 강 대사는 구조기를 놓친 이후 공항으로 피신한 김용수 주소말리아 북한대사 등 북측 인사 14명을 만났는데, 이 자리에서 '공동 대피'를 제안했다.

당시 강 대사는 본부로 보낸 전보에는 “김용수 대사는 (공동대피 제안에) 1시간 반의 여유를 달라고 했고, 북한 공관원들은 자기들을 보호할만한 기관을 찾아갔으나, 모든 행정기관이 마비 내지 풍비박산된 사실을 확인하고는 제의를 수락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그 결과 남북 대사들은 각자 대사관 직원들을 대동해 이탈리아가 주선한 항공기를 타고 케냐 몸바사로 탈출했다.

강 대사는 공동 대피 과정에서 남북 관계를 고려해 북측을 배려한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한국 외무장관 역시 주케냐대사에게 보낸 전보를 통해 귀국 기자회견과 관련 “강 대사의 인도적인 도움이 자칫 과장 보도됨으로써 이를 가지고 우리가 너무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한다는 인상을 북한 측에 주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고노담화 이끌어 낸 노태우 ‘서해사업’


정부는 1992년 11월 '서해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노태우 당시 대통령의 일본 방문을 극비리에 추진했다. 실제 노 전 대통령은 11월 18일 일본 교토에서 한일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연합뉴스
외교문서를 통해 92년 11월 정부가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일본 방문을 극비 추진한 사실도 공개됐다. 공개 문서에 따르면 92년 10월 14일 당시 이상옥 외무부 장관은 오재희 주일대사에게 ‘서해사업’이라는 제목의 전보를 보냈다. 노 전 대통령 방일 추진 계획을 설명하고, 일본 측과의 방일 일정 조율 및 후속 조치를 지시하는 내용이었다. 실제 노 전 대통령은 그해 11월 18일 일본 교토에서 당시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열었다.

노 전 대통령의 방일 이후 국내에서 비판 여론이 들끓자 정부는 “(한·일 정상이) 격식 없이 쉽게 자주 만나는 새로운 정상외교의 관행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며 양국 소통 필요성을 강조했다. 정상회담에도 불구하고 당시 최대 현안이었던 위안부 문제의 해결 조짐이 보이지 않는단 비판에 대해선 “보약을 먹으면 몸이 튼튼하게 되고 병도 잘 낫는 것처럼 정상외교를 통해 양국 우호 관계를 튼튼히 하고 현안 타결의 여건과 분위기를 조성하게 된다”고 설득했다.

결국 일본은 1993년 8월 고노 담화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 모집의 강제성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이어 1994년에는 일본 고등학교 교과서 23종 중 22종에 일본군 위안부 관련 내용을 기술했다.


“청구권 협정, 개인 권리 해결 아냐”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달 21일 국무회의에서 한일청구권 협정에는 개인 청구권이 포함돼 있다는 취지의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정작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당시 한일 협정 대표는 개인의 청구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연합뉴스
외교문서에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과 관련 ‘개인 청구권’을 둘러싼 한·일 양국의 과거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내용도 담겼다. 개인 청구권은 일본 피고 기업(미쓰비시중공업·일본제철)이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손해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2018년 대법원 판결의 핵심 근거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달 21일 국무회의에서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은 한국 정부가 개인 청구권을 일괄 대리해 일본의 지원금을 수령한다고 돼 있다”며 협정을 통해 개인 청구권이 소멸했다는 취지로 언급했다.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당시 한국 측 교섭 대표였던 민충식 전 수석은 1991년 한 포럼에서 개인의 청구권이 유효하다는 데 한일이 같은 견해를 갖고 있었다는 취지로 언급했다. 외교부

공개 문서에 따르면 청구권 협정 당시 한국 측 교섭 대표였던 민충식 전 청와대 정무수석은 91년 8월 3~4일 일본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 지역 전후 보상 국제포럼’에서 “(청구권협정) 교섭 대표 간에도 동 협정은 정부 간 해결을 의미하며 개인의 권리는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암묵적인 인식의 일치가 있었다”고 말했다.

민 전 수석은 개인의 청구권에 대한 일본 측 입장에 대해서도 “당시 시이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 일본 외무상도 동일한 견해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는 현재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모든 배상이 끝났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데, 정작 청구권 협정 당시엔 일본이 개인의 청구권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정진우 기자 dino8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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