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정권이 떠넘긴 전기·가스요금 어쩌나…與, 인상 땐 지지율 걱정에 엉거주춤
與, 한전·가스공사에 28조 절감 구조조정 요구
요금 인상은 보류…한전채 발행도 일단 자제
'민생-시장경제' 딜레마 속 요금 고민 지속돼
문재인정권으로부터 원치 않은 유산(遺産)인 한국전력공사·가스공사 대규모 적자를 물려받은 정부·여당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탈원전 여파 등으로 지난 한해에만 수십조원의 적자를 낸 이들 공사의 정상화를 위해서는 전기·가스요금 인상이 불가피하지만, 총선을 1년 앞둔 시기에 이러한 조치는 자칫 지지율 하락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힘은 6일 국회에서 민·당·정 간담회를 열고 전기·가스요금 문제를 정부·민간 기업과 논의한 결과, 인상을 재차 보류하기로 했다. 전기·가스 요금이 민생과 맞닿아 있는 만큼 갑작스러운 인상이 서민들의 생계에 부담이 될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대신 국민의힘은 한국전력공사(한전)와 가스공사에게서 2026년까지 총 28조원 규모의 비용 절감을 목적으로 한 구조조정을 하겠다는 확약과 함께 에너지 요금 조정 시 취약 계층 지원 확대 및 분할 납부, 캐시백(적립금) 제도 등 다양한 국민 부담 경감 방안을 제시했다.
이번 간담회는 지난달 29일과 31일 당정협의회 이후 열린 것이다. 국민의힘에서는 박대출 정책위의장과 기획재정위원회 여당 간사인 류성걸 의원,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간사인 한무경 의원 등 참석했다. 정부에서는 박일준 산업통상자원부 2차관, 정승일 한국전력공사 사장과 최연혜 한국가스공사 사장 등 에너지 공기업 관계자, 시민단체·학계 전문가 등도 참석했다.
박대출 정책위의장은 "한전과 가스공사는 비핵심자산을 매각하고 공급 안정성을 유지하는 범위 내에서 고강도 긴축경영을 통한 비용 절감을 하기로 했다"며 "2026년까지 총 14조원, (두 공사를 합치면) 28조원 규모의 자구 노력을 강도 높게 추진하겠다는 계획을 보고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 부분과 관련해 이 정도면 국민이 동의할 수 있을 것인지 깊이 고민해야 된다는 말씀을 드렸고, 국민들이 그만하면 됐다고 할 때까지 뼈와 살을 깎는 구조조정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고 설명했다.
일각에선 이같은 선택이 총선을 앞두고 지지율의 하락세를 걱정해야 하는 동시에 시장경제주의의 철학을 유지해야 하는 국민의힘의 딜레마가 반영된 결과라고 분석하고 있다.
당장 이 자리에서도 소비자·민간단체는 전기·가스 요금의 인상에 반대하는 의견을 냈다. 김연화 소비자공익네트워크 회장은 "(소비자들은) '화난다'부터 해서 다양한 의견을 내고 있다. 에너지도 소비자 중심으로 전환해야 한다"며 "누진제에 대한 소비자들의 저항이 크다. 소비자가 잘 알 수 있도록 정보 공유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국민의힘이 전기·가스요금을 섣불리 결정하지 않고 보류하는 이유도 이같은 민심 때문이다. 최근 당 지지율이 완연한 하락세를 나타내고 있는 만큼 민생과 직결된 전기·가스 요금 인상이 추가적인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단 우려가 제기되고 있어서다.
국민의힘의 고민은 지난달 31일 전기·가스요금 관련 당·정협의회에서 확실히 드러났다. 당시 박 정책위의장은 "국제 에너지 가격 변동 추이와 인상 변수를 종합적으로 판단하기 위해 전문가 좌담회 등 여론 수렴을 좀 더 해서 추후 (인상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며, 올 2분기 요금 인상을 보류하는 배경을 설명했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국민의힘이 전기·가스 요금을 올리지 못하는 이유는 총선에의 악영향을 우려하기 때문"이라며 "지금 국민연금 개혁이나 이런 것들을 보면 이번 정부가 전기요금과 가스요금을 올리긴 올릴 거라고 보는데 지금은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전기·가스 요금의 인상을 마냥 늦추는 것도 쉽지 않다. 한국전력공사는 문재인정권 시절 무리한 탈원전 정책 여파에 휩쓸린데다, 지난 정권이 전기요금 인상을 적시에 단행하지 않고 미루면서 재무 구조가 크게 악화됐다.
전기를 팔아 원가의 70%밖에 회수하지 못하는 한전은 지난해 32조6000억원의 적자를 냈다. 올해 상반기에도 10조원이 넘는 적자를 기록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한전은 한 달에 네 차례에 걸쳐 발전사에 전기를 구매하고 그 대금을 지급해야 한다. 돈줄이 마른 한전이 대금을 마련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채권을 발행하거나 은행에서 대출을 받는 것이다. 통상 은행 대출금리가 회사채 발행금리보다 높아 한전이 필요한 돈을 모두 은행 대출로 충당하긴 부담스럽다. 결국 남은 건 한전채 발행이다.
3월말 기준 한전채 발행 잔액은 68조300억원으로 집계됐다. 1년 전 잔액(39조6200억원) 대비 72% 늘었다. 국회도 지난해말 한전법을 개정해 한전채 발행 한도를 자본금과 적립금을 더한 규모의 기존 2배에서 5배로 올렸다. 경영 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긴급 상황에선 산업부 장관의 승인으로 한도를 6배까지 늘릴 수 있도록 했다.
문제는 한전채가 금융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간단치 않다는 점이다. 한전채는 일반 회사채와 달리 정부가 지급을 보증하는데다 금리까지 높아 인기가 높다. 한전채에 자금이 쏠리면 시중의 일반 회사는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국민의힘 한 의원은 "한전채 발행이 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큰 만큼 이를 너무 늘리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일단은 그걸 최소화 하겠다는 한전 측의 의견도 나왔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자유시장경제를 지향하는 국민의힘이 한전에 가혹한 결정을 내린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온다.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경제 철학을 갖고 있는 국민의힘이 공공재 가격에 너무 깊숙이 개입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다.
또다른 국민의힘 의원은 "한전 측 구조조정 프로그램도 좀 더 강화해 소상공인 취약계층 등 민생 측을 어떻게 두텁게 할 수 있는지를 고민을 하고 난 다음에 요금을 최종 결정할 것 같다"며 "시장주의자라는 시그널을 확실히 주고 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다. 다만 지금 요금을 올렸을 때의 충격을 완화시킬 수 있는 시간과 장치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걸 준비하는 의미도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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