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과 바실리카 양식’이 어우러진 성당이 강화에?

장창일 2023. 4. 6.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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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복음의 첫관문을 가다]
<하> 복음과 전통이 만난 강화
이경래 강화성당 신부가 4일 인천 강화군 성당 마당에서 복음과 전통이 어우러진 강화 선교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김포와 강화도를 잇는 강화대교를 건너자마자 오른편에 강화기독교역사기념관(이사장 최훈철 목사)이 나타났다. 지난해 강화도 교계와 강화군 등 지자체가 협력해 개관한 기념관은 연면적 1884㎡(570평)에 강화도 복음화의 여정과 강화 3·1운동사 등을 소개하고 있다.

한국교회총연합(대표회장 이영훈 목사)의 ‘한국교회 140년 근대 기독교 문화유산 탐방팀’이 4일 오전 찾은 기념관에서는 기독교가 섬에 전파된 과정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강화도에 우리나라 최초의 해군사관학교 ‘통제영학당’이 있었다는 사실이나 성공회대학교의 전신인 ‘성 미카엘신학교’가 1914년 강화도에 세워졌다는 얘기도 기념관에서 처음 들을 수 있었다.

선교지 분할정책에 따라 감리교와 성공회의 선교지였던 강화도에는 여전히 오랜 역사를 지닌 교회들이 많다. 지금도 강화도 전역에는 200여개의 교회가 있고 인구 절반이 기독교인이다. 이 모든 결실이 19세기 말 심긴 복음의 열매인 셈이다.

강화도기독교역사기념관 전경.

최훈철 이사장은 “강화도 선교는 처음에는 외국인들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쉽지 않았지만 결국 섬의 구석구석까지 교회가 세워지며 복음의 섬이 됐다”면서 “그 모든 역사가 이곳 기념관에 소개돼 있다”고 소개했다.

19세기말 강화 선교의 출발은 험난했다.

비행기가 없던 시절 강화도는 외국의 배가 한양으로 오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한강의 입구였다. 남북 분단으로 서해에서 한강으로 이어지는 수로가 막혔지만 강화도는 통일이 되면 수상교통의 핵심 요충지가 될 수밖에 없다.

이 섬이 병자호란과 병인양요, 신미양요의 파고를 직접 받아낸 것도 이 같은 지리적 이유 때문이다. 강화를 수비하는 군대와 전투를 벌이지 않고 한강에 들어가는 건 불가능했다. 강화도 사람들은 전국 그 어느 지역보다 일찍 서양 군인들과 싸웠다. 서양 선교사들에 의한 선교가 어려웠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도 강화를 향했던 복음의 열정은 굳게 닫힌 문을 끈질기게 두드렸다. 기념관에서는 성공회의 파송을 받은 레너드 워너 선교사의 흔적도 볼 수 있다. 그는 1893년 강화도 선교를 결심했지만 강화도 사람들이 도성 안으로 들어오는 걸 막았고 결국 갑곶 나루터 근처에 예배당을 세웠다.

조지 존스 감리교 선교사도 강화 선교의 개척자 중 하나다. 강화 선교를 준비하던 그는 1894년 인천 제물포에서 만난 이승환의 요청에 따라 그의 어머니에게 세례를 베풀기 위해 강화도에 도착했다. 외국인에 대한 거부감으로 세례식은 깊은 밤 배 위에서 진행됐다. ‘선상 세례’는 결국 강화도의 첫 감리교회인 교산교회(박기현 목사) 설립으로 이어졌다.

기념관에서 서북쪽으로 16㎞ 떨어져 있는 교회에 들어서니 가장 먼저 선상 세례를 구현한 조형물을 볼 수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 물 위에 띄운 쪽배에서 베푸는 세례의 감동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 같았다.

교산교회 마당에 있는 선상 세례를 구현한 조형물.

인천이 첫 개신교 선교사들을 맞이했다면 강화는 전통과 복음이 어우러져 부흥한 곳이다.

가장 대표적인 교회가 대한성공회강화성당(이경래 신부)이다. 1900년 찰스 존 코프 주교가 세운 성당의 외부는 전통 한옥 양식이며 내부는 바실리카 양식으로 서구 기독교의 토착화 산물로 꼽힌다.

성당 입구에 ‘天主聖殿(천주성전)’이라고 쓰인 현판이 순례객을 먼저 맞았다. 현관 기둥에도 ‘처음도 없고 끝도 없으니 형태와 소리를 먼저 지은 분이 진실한 주재자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만물을 주관하시니 참 근본이 되신다’는 등 다섯 가지 주련(柱聯)이 한시 형태를 띠고 한자로 적혀 있다. 주련은 건물 기둥이나 벽에 써서 붙이는 글귀를 말한다.

이뿐 아니다. 성당의 뜰에는 유교와 불교를 상징하는 회화나무와 보리수나무도 심겼다. ‘이질적이지 않은 교회’를 만들기 위해 내린 결단이었다.

이경래(가운데) 신부가 4일 강화성당을 방문한 순례단에게 성당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이경래 신부는 “서양과 동양의 전통이 어우러진 강화성당은 서양 종교인 기독교를 낯설어하는 주민들을 위해 처음부터 이런 시도를 했고 그 전통이 123년 동안 이어지고 있다”면서 “한옥 예배당에서는 한겨울을 제외하고는 지금도 실제 예배를 드리고 있다. 이번 부활절 예배가 올해 첫 예배를 드리는 날”이라고 전했다. 강화=글·사진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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