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과손스튜디오, “‘레미제라블’을 판소리로 들어보세요”
19세기 프랑스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은 주인공 장발장을 비롯해 수많은 인물을 통해 인간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다. 분량이 방대해서 읽기 어렵지만, 많은 사람이 어린 시절 청소년용 축약본을 읽거나 동명 뮤지컬 또는 영화로 접해서 내용은 친숙하다.
판소리 공동창작집단 ‘입과손스튜디오’가 소설 ‘레미제라블’을 판소리로 만들었다. 오는 8~22일 서울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공연되는 ‘판소리 레미제라블-구구선 사람들’(이하 ‘구구선 사람들’)은 원작의 서사를 바탕에 두고 ‘세상은 한 척의 배’라는 설정으로 새롭게 각색됐다. 장발장은 장씨로 등장하는 등 서사와 인물을 한국에 맞게 바꾼 것이 특징이다.
2017년 창단된 입과손스튜디오는 소리꾼 이승희 김소진, 경기민요 소리꾼 겸 고수 신승태, 고수 김홍식 이향하, 프로듀서 유현진으로 이뤄진 창작공동체다. 이들은 소리꾼 이자람이 이끌던 창작판소리 단체인 ‘판소리만들기-자’ 출신이다. 판소리만들기-자는 2007년 창단 이후 현대인에게 친숙한 소설과 희곡을 판소리로 만든 ‘사천가’ ‘억척가’ ‘이방인의 노래’ ‘여보세요’ 등을 선보여 젊은 관객들을 매료시켰다. 판소리만들기-자는 2017년 해단했지만 이향하와 이승희 등의 멤버들은 입과손스튜디오를 만들어 새로운 출발에 나섰다.
입과손스튜디오는 정통 국악, 동화, 현대소설, 외국 고전 등을 가리지 않고 재해석해 자신만의 판소리로 만든다. 예를 들어 ‘완창 판소리 프로젝트’는 소리꾼과 고수만 출연하는 전통적인 완창 판소리를 한바탕 버라이어티 쇼처럼 꾸몄다. 전체 공연시간을 줄이는 한편 소리꾼과 고수를 여럿 등장시킨데 이어 타악 밴드, 연희단까지 동원함으로써 현대적 감각을 입혔다.
또 ‘구구선 사람들’은 여러 토막소리(일부 장면만 공연하는 부분창)가 모여 완창 판소리가 된 전통 판소리의 연행 방식을 모티브로 만들었다. 입과손스튜디오는 3년간 원작 속 팡틴(여자), 마리우스(청년), 가브로슈(아이)를 토막소리의 주제로 선택해 무대화했다. 그리고 지난해 처음으로 완창 판소리 ‘구구선 사람들’이 선보여졌는데, 장발장 이야기를 중심으로 세 인물의 삶이 자연스럽게 하나로 엮여 있다. 이번에 공연되는 ‘구구선 사람들’은 지난해 초연을 수정 및 보완한 것이다.
공연을 앞두고 입과손스튜디오를 이끄는 고수 이향하(39)와 소리꾼 이승희(41)를 두산아트센터에서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두 사람을 중심으로 써달라며 인터뷰에서 빠졌지만, 프로듀서 유현진도 옆에서 살짝 거들었다.
“입과손스튜디오를 만들 때 멤버들끼리 플레이어를 넘어 창작자로 거듭나는 결과물을 만들자는데 뜻이 일치했습니다. 다들 창작방식에 대한 관심이 많았는데, 전통 판소리가 오랜 세월 소리꾼과 고수를 거치며 만들어진 공동 창작물인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만들어보자고 했죠.”(이향하)
이향하는 다양한 악기를 사용해 판소리 고법(북 치는 방법)의 확장을 실험하는 고수다. 이외에 밴드 활동, 음악극 제작, 장단 연구 및 교육 등 다양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아마도이자람밴드에서 퍼커션을 담당했던 그는 2007년 판소리만들기-자에서 이자람의 판소리 ‘사천가’에서 고수로 본격 데뷔한 이후 다양한 창작 판소리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현대 판소리 작업은 대부분 연극 방법론에 따라 짧은 호흡으로 만들어져요. 저희는 ‘판소리다움’을 고민하며 긴 호흡으로 소리꾼과 고수의 시선이 중심이 되는 작품을 만들려고 합니다. 팀명인 입과손은 소리꾼의 ‘입’과 고수의 ‘손’을 뜻하는데, 승희 언니의 아이디어에서 나왔어요. 입과 손을 연결하는 ‘과’도 중요한데, 기획자 또는 프로듀서라고 생각해요. 저희 팀에서 유현진 PD의 역할이 크거든요.”(이향하)
이승희는 맑은 소리, 탁월한 발림과 함께 발군의 연기력을 가진 소리꾼이다. 판소리 외에도 연극과 뮤지컬 등에서 배우로도 활동하고 있다. 판소리만들기-자를 통해 창작 판소리에 본격적으로 눈뜬 그는 입과손스튜디오의 작업 외에도 2018년 두산아트센터의 DAC아티스트로 선정된 이후 동초제 춘향가를 새롭게 구성한 ‘몽중인’ 시리즈를 선보여 왔다.
“입과손스튜디오는 공동창작이다보니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고 설득하는 과정이 꽤 길어요. 특히 처음에 대본을 만드는 게 시간이 걸렸던 것 같아요. 예를 들어 ‘구구선 사람들’의 경우 원작 소설의 일정 부분을 읽고 각자 대본을 만든 뒤 토론을 거쳐 하나의 완성된 대본을 만드는 작업을 반복해야 했죠. 이런 과정을 겪다 보니 작품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장점은 있어요. 그래서인지 작창(소리를 짜는 것)은 빨리할 수 있었어요.”(이승희)
2000년대 이후 창작 판소리 작업이 많아지면서 이야기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입과손스튜디오는 이야기 자체보다는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에 초점을 둔다는 점에서 창작 판소리의 새로운 방향성을 보여준다. 소설 ‘레미제라블’을 택한 것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어디에나 존재하는 ‘불쌍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과 함께 토막소리들을 많이 만들기에 적합하기 때문일 것이다.
“‘레미제라블’ 등 빅토르 위고의 소설들은 발간되자마자 인기를 끌었다고 해요. 이야기의 매력이 워낙 크니까요. 그런 점에서 ‘레미제라블’은 이야기 예술인 판소리랑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게다가 원작 소설에서 위고가 스토리에서 약간 벗어난 내용도 장황하게 펼치는 게 판소리와도 닮았습니다. 지난해 프랑스에서 열린 ‘K-VOX 한국소리 페스티벌’에서 ‘구구선 사람들’을 선보이고 나서 위고의 생가에 다녀왔어요. 그래서인지 이번 작업을 하면서 위고라면 어떤 생각을 했을지 생각이 많이 나더라고요.”(이승희)
이번에 선보이는 ‘구구선 사람들’은 최종 완성본이 아니다. 입과손스튜디오가 앞으로 원작 속 인물인 자베르, 테나르디에 부부 등으로 토막소리를 만들 계획을 하고 있어서다. 이향하는 “토막소리를 통해 인물의 서사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이런 토막소리들이 모이면서 완창 판소리가 훨씬 풍성해진다”고 설명했다.
입과손스튜디오는 창단 이후 6년간 무려 17개나 되는 작품을 만들었다. 영등포구에 마련한 연습실에 거의 매일 모여 작업한 결과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공연을 제대로 올릴 수 없었던 만큼 더더욱 창작에 몰두할 수 있었다. 유현진은 “우리 멤버들은 만나면 투닥거리면서도 자주 만난다. 연습실을 영등포구에 마련한 뒤 멤버들이 아예 영등포구로 이사 온 덕분에 거의 매일 만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며 웃었다.
다만 멤버 가운데 신승태가 2021년 초 KBS TV ‘트롯전국체전’에 참가해 4위를 기록한 후 트로트 가수로 활동하느라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입과손스튜디오의 공동작업에 참여하기 어렵게 됐다. 바쁜 와중에도 지난해 ‘구구선 사람들’ 초연 및 프랑스 공연을 마쳤지만, 올해 공연에는 참여하지 못한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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