父빈자리에 생계전선 뛰어든 고3…어린자녀 길 막은 가족돌봄
고등학교 3학년인 정하늘 군은 9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동생이 태어난 지 한 달 만의 일이었다. 정 군 어머니는 산후 조리 한번 제대로 못 하고 생계 전선에 뛰어들었다. 정 군이 부모를 대신해 갓난 동생을 돌본 것도 그 때부터다. 정군은 5일 오후 국회 소통관에서 열린 ‘가족 돌봄 아동·청소년·청년’ 지원법 제정 촉구 기자회견에서 “초등학교 2학년인 저에게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라며 “어린 동생의 분유 먹이기, 기저귀 갈기, 달래기, 간식 주기 모두 제 일이었다”라고 말했다.
동생은 지금 초등학교 4학년이 됐다. 예전만큼은 아니어도 여전히 정 군 손이 필요하다. 이날도 동생을 15분 거리의 학교에 데려다 주고 국회로 왔다. 최근에는 정 군 역할이 더 많아졌다. 생계를 담당하던 어머니가 허리 협착증을 앓게 되면서다. 학교 다니며 빨래·청소·설거지 등 가사를 돕고 가끔 단기 아르바이트를 해 생활비도 보탠다. 정 군은 “어머니와 동생을 지탱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생긴다”고 토로했다.
이날 서영석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은 초록우산어린이재단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가 이런 가족 돌봄 아동·청소년·청년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며, 관련 법 제정을 촉구했다. 서 의원은 지난달 23일 만 34세 이하의 아픈 가족을 돌보는 이들을 가족 돌봄 아동·청소년·청년으로 규정하고 관련 지원을 위해 국가와 지자체 책임, 역할을 명확히 하는 내용의 가족 돌봄 아동·청소년·청년 지원법을 대표발의했다.
서 의원은 “정부가 작년 2월 가족 돌봄 청년 지원 대책을 발표했지만, 실태조사 결과 발표와 입법 추진이 감감무소식인 상황”이라면서 “칭찬, 연민의 대상으로만 여겼던 가족 돌봄 아동·청소년·청년을 국가와 사회가 적극적으로 책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 의원은 “미래를 준비해야 할 시기의 돌봄 역할 수행은 현재뿐 아니라 생애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가족 한 명이 아프면 한 가정이 무너지고, 어린 자녀는 꿈을 포기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라며 법 제정을 촉구했다.
이날 가족 돌봄 청년인 조기현 돌봄청년 커뮤니티 n 인분 대표는 “돌봄을 하는 아동·청소년·청년은 늘 있어왔지만 효자, 효녀라는 말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을 뿐”이라며 “이들이 돌봄 대상일 뿐 아니라 돌봄 주체로 살고 있음을 인정해야 아픈 가족이 있다는 것만으로 권리를 박탈 당하는 일을 막을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정하늘 군은 “돌봄은 예기치 못하게 시작된다”라며 “돌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그로부터 오는 두려움과 미래에 대한 막막함이 힘들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현실의 무게 앞에 무너지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에 도전하며 나아갈 수 있도록 경제적인 부분만이 아닌 학업·자립·심리 등을 지원해주는 법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황영기 초록우산어린이재단 회장은 “정부가 가족을 돌보는 아동·청소년들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있는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실질적으로 어느 시점에 어떤 지원이 필요한 지에 대한 정확한 실태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이들을 사회 안전망에 포함하는 법적 용어나 지원체계 등도 부재한 상황”이라며 “정부와 국회가 더는 가족이라는 이유로 돌봄의 부담과 책임을 떠안고 소외되고 있는 아이들을 방치하지 않길 바란다”고 했다. 재단 측은 이날 관련 법안 제정을 촉구하는 9000명의 서명을 국회에 전달했다.
황수연 기자 ppangsh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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