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에 선 직폭]③실적 압박에 숨진 은행원…'괴롭힘 배상' 받기 어렵다
은행원 A씨는 지난 2018년 4월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유서엔 실적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아내는 "실적 압박에서 비롯된 직장 내 괴롭힘이 원인"이라며 은행 배상책임을 묻는 민사소송을 냈다.
2020년 2월 인천지방법원은 "지점장의 실적 압박은 A씨가 받을 스트레스는 가볍게 여기면서 과도한 부담을 주는 행위였고, 배려와 존중이 없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재판 결과는 유족 패소였다. 재판부는 "지점장이 사회평균인의 입장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정신적 고통을 줬다고 보기는 어렵다. 관련 증거만으로는 가해행위를 인정하기에 부족하다"며 "지점 동료들은 A씨의 스트레스를 알았다고 해도, 은행의 인사책임자가 알 수 있었다고 볼 수도 없다"고 패소 이유를 밝혔다.
직장 내 괴롭힘은 심한 경우 피해자의 죽음을 부르기도 한다. 이렇게 돌이킬 수 없는 상황까지 가지 않더라도, 피해자는 가해자와 회사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업무상 지위나 관계가 우월한 점을 이용해 다른 근로자에게 과도한 고통을 주거나 근무 환경을 악화시키는 것은 ‘위법한 직장 내 괴롭힘’이며 피해자에 대해 민사상 책임을 져야 한다"는 대법원 판례가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피해자가 만족할 만큼의 손해배상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통상 피해자는 ‘근로자의 사망에 따른 정신적 피해’와 ‘정상적으로 근로했다면 얻을 수 있었을 수입’ 등을 배상하라고 요구한다. 문제는 ‘증명’ 과정이다.
민사소송에서 증명 책임은 배상을 요구하는 쪽에서 부담한다. 하지만 피해자와 가해자 단 둘이 있는 상황에서 괴롭힘을 당했다면 증명이 어렵다. 목격자가 있어도, 그들 역시 가해자와 같은 직장에 계속 다녀야 하거나 사측과 이해관계로 얽힌 경우가 많아 증언에 부담을 느낀다.
양태정 법무법인 광야 대표변호사는 "직장 내 괴롭힘 피해 상황이 담긴 녹음 파일이나 메시지 등 증거를 제시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피해자가 괴롭힘을 당하는 와중에 이런 증거를 일일이 확보하기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아시아경제가 최근 2년간 ‘직장 내 괴롭힘’을 못 이기고 극단적인 선택을 한 피해자 유족이 낸 민사소송 1심 판결문 8건을 확보해 분석해 본 결과, 가해자 측의 배상책임이 인정된 경우는 3건에 불과했다.
지난 2월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카드사 직원 B씨의 유족들이 회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를 기각했다. B씨 유족들은 직장 내 따돌림과 부당한 인사 및 평가 등을 호소했지만, 재판부는 "통상의 관행대로 인사가 이뤄졌거나 합리성과 필요성이 인정된다면 불리한 처우 또는 사업주의 보호의무 위반이라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또 법원에서 가해자의 배상 책임을 인정해도, 유족이 청구한 금액에 훨씬 못 미치는 금액만 인정한 경우도 많다.
외항선 기관사로 일하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구모씨의 유족은 손해배상 소송을 내고도 ‘가해자로 지목된 선배와 선장 및 회사에 일부 배상 책임이 있다’는 판결을 받기까지 2심을 거치며 5년을 기다려야 했다. 구씨는 2018년 3월 선박이 페르시아만을 지날 때 유서 한장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유서 앞면엔 가족에 대한 미안함이, 뒷면엔 괴롭힘 가해자로 지목된 2등 기관사 선배에 대한 원망이 담겨 있었다.
구씨 사건에서도 유족 측은 구씨가 괴롭힘 상황을 호소하며 지인들에게 보낸 메시지 등을 모아 증거로 제출했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선배의 괴롭힘 행위와 구씨의 사망에 연관성이 없다고 봤다. 항소심에서는 일부 뒤집혔지만, 법원이 인정해준 배상액은 유족이 청구한 금액의 5분의 1 정도였다. 소송비용 대부분도 유족 측이 부담하도록 했다. 게다가 사측의 불복으로 유족들은 다시 대법원의 최종 판단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다.
양 변호사는 "직장 내 괴롭힘 문제가 사회문제화하면서 손해배상 인정 금액이 예전보다 조금 늘어나는 판결 경향은 있다"라면서도 "그래도 피해자가 극단적 선택을 한 사례조차 배상액이 통상 1000만원에서 아주 많아야 1억원 안팎으로 결정된다"고 말했다.
김대현 기자 kd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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