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보국, 패기, 인간중심"…SK DNA 만든 최종건·최종현 경영철학
최종현 "기업 경영에서는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
SK그룹이 창립 70주년(8일)을 맞아 발간한 최종건 창업회장과 최종현 선대회장 형제의 어록집 ‘패기로 묻고 지성으로 답하다’에는 최빈국 대한민국을 경제 선진국으로 만들겠다는 염원과, 형제 경영의 시너지, 현 최태원 회장의 시대까지 이어지는 인간 중심 경영 등을 엿볼 수 있는 어록들이 담겨 있다.
주요 어록을 통해 SK 70년을 관통하는 최종건-최종현 형제의 경영철학을 살펴본다.
“내가 기업을 하고 있지만 저 공장은, 저 재산은 제 개인의 것이 아니고 국민의 것입니다. 즉 직원의 발전이 회사의 발전이요, 회사의 발전은 국가의 발전입니다.” - 최종건 창업회장, 1969년 신풍소학교 동창 모임에서.
최종건 창업회장과 최종현 선대회장은 기업경영이 국가경제 발전에 기여해야 하며, 기업의 이익 추구 활동을 통해 대한민국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평생 실천한 기업인이었다.
최종건 창업회장의 일생을 관통했던 기업관은 ‘사명감’이었다. 그는 평소 자신의 세대가 “겨레의 장래를 가름할 무거운 사명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며, 사업보국과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평생을 애썼다.
한국전쟁 이후 최빈국 대한민국이 세계 경제 10위권으로 성장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배경은 수출 주도 성장이었다. 최종건 회장은 그 사실을 일찍 간파하고 외국 기업과 연결된 작은 인연 하나 없는 상황에서 무모한 도전 끝에 1962년 대한민국 최초의 직물 수출 기업으로 이름을 올렸다.
첫 수출의 손실에도 최고의 품질을 고집했던 최종건 회장은 항상 직원들에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마음으로 일하라”고 강조했다.
“우리는 인더스트리얼리스트다.” - 최종현 선대회장, 1989년 미얀마석유 개발 프로젝트의 실패 후에
두 번의 오일쇼크를 겪은 후 최종현 회장은 국가의 ‘에너지 자립’ 중요성을 절감하고 유공 인수 후 해외 석유개발 사업에 뛰어들었다. 석유개발은 막대한 자본이 들고 성공률도 낮아 주변의 만류가 심했다.
“장사꾼과 기업가의 차이는 돈을 어떻게 쓰느냐에 있다. 개인적인 이해보다 나라 경제에 대한 공헌을 우선해야 한다. 우리는 인더스트리얼리스트다.” 그의 의지와 결단은 1987년 북예멘 유전개발에 성공하는 결실로 이어져, 대한민국이 무자원 산유국의 꿈을 이뤄내는 원동력이 됐다.
“이제 전경련은 대기업의 이익이나 대변하는 그런 단체가 아닙니다. 자율·창의·경쟁을 바탕으로 한 시장 경제의 원리를 발전시키는 것만이 우리 경제를 정상적으로 키우고, 나라를 살찌우는 근본이라고 생각합니다.” - 최종현 선대회장, 1993년 2월 전경련 회장 수락 연설에서
최종현 선대회장은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에 취임한 이래 생애의 마지막 6년 동안 운명처럼 전경련 회장의 역할을 다했다. 기업 혁신과 재계의 신뢰 회복,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해 학계와 재계, 정부를 오가며 혼신의 힘을 다했다. 특히, 침체 일로에 있는 한국 경제에 활력을 되살리고 국제수지를 흑자로 전환시키기 위해 민간경제가 할 일을 찾아 나섰다.
최종현 회장은 전경련 회장 시절 ‘미스터 국가경쟁력강화’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는 자신보다 국가를 먼저 생각했고, 국가가 강한 경쟁력으로 국제 경제 전쟁에서 살아남게 하는 것이 자신의 책무라고 생각했다. 그는 “국가를 대표해 해외에서 사업을 하는 경제인은 사업에 앞서 국가와 사회를 생각하며 세계를 상대해야 하기에 단순한 비즈니스맨이 아니라 ‘비즈니스 스테이츠맨’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전에 강한 최종건, 이론에 강한 최종현…형제 경영 시너지
최종건 회장과 최종현 회장은 남다른 우애와 사업 파트너로서의 시너지로 선경을 국내 1위 섬유 기업으로 성장시켰고, 워커힐 인수 등 사업 다각화를 이뤘다.
최종현 회장은 1962년 11월 부친 최학배 공의 사망을 계기로 형 최종건 회장이 선경직물의 급성장과 함께 자금 조달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알고 선경직물 부사장으로 경영에 합류했다.
최종건 회장은 실전에 강하고, 동생은 이론으로 무장해 둘의 조화가 경영의 하모니를 이뤘다. 사람들은 두 형제를 ‘선경의 용장과 지장’ 혹은 ‘선경의 쌍두마차’라고 불렀다.
“기업 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획, 다시 말해 플래닝(Planning)이다. 국가에 경제 계획이 있듯이 기업에도 사업 계획이 있어야 한다. 결국 경영의 성패는 기획에서 시작된다.” - 최종현 선대회장, 1962년 선경직물 부사장으로 경영에 참여하며
최종현 회장이 개발과 판매, 공장 건설 등의 아이디어를 내고 인력을 모으면 최종건 회장은 자금을 마련하고 특유의 추진력으로 이를 실현하며 회사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특히, 두 형제가 원대한 비전으로 1966년 1월 수립한 선경 5개년 계획을 통해 1968년 아세테이트 원사 공장 건설을 시작으로, 1968년 제2의 직물 공장 증설, 1969년 폴리에스터 원사 공장 건설 등 ‘섬유에서 원사까지 수직계열화’라는 원대한 꿈을 실현하며 국내 1위의 섬유메이커로 도약한다.
“우리의슬기와 용기로써 뚫지 못할 난관은 없으며, 우리의 성실과 창의로써 이룩할 수 없는 목표도 없다.” - 최종건 창업회장, 1973년 신년사에서
최종건 회장의 마지막 해인 1973년, 두 형제는 워커힐 인수를 통해 사업 다각화를 도모했고, 선경석유를 설립하며 ‘석유에서 섬유까지 완전 수직계열화’의 꿈을 키웠으나, 선경석유는 1차 석유파동으로 무산됐다.
이후 최종현 회장은 1980년 대한석유공사를 인수하고 1991년 울산콤플렉스를 완공해 ‘석유에서 섬유까지 완전 수직계열화’를 완성하며, 형 최종건 회장과 함께 꿨던 꿈을 이뤘다.
'사람을 사람답게'…인간 중심 경영의 실천
최종건 회장과 최종현 회장은 일찍부터 사람의 중요성을 깨닫고, 무엇보다 그들을 마음으로 대했다. 오직 ‘발전’만이 미덕이었던 시대를 살면서도 인간 중심 경영을 위해 부단한 노력과 투자를 아끼지 않은 국내 재계에 매우 드문 기업인들이었다.
“기업을 일으키는 데 있어서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사람은 돈으로 살 수가 없다. 돈으로 사람을 사면, 그 돈의 가치가 떨어질 때쯤 그는 떠날 생각을 한다. 마음을 주고 사람을 사면, 그는 그 기업을 위해 온몸을 바친다.” - 최종건 창업회장의 경영 철학
최종건 회장의 마음은 언제나 사람에 대한 따뜻한 애정으로 가득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잿더미 속에서 선경직물을 일으킨 이유이기도 했다. 그는 공장을 가동해 한사람이라도 더 일할 수 있고, 이를 통해 빈곤을 극복하고 좀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랐다.
한국전쟁 후, 악화된 전력사정으로 공장 가동이 중단되는 날이 이어지자 최종건 회장은 그때마다 촛불을 켠 채 초등교육을 받지 못한 직원들에게 직접 한글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들의 인생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한글 교실’을 시작했던 것이다.
또, 최종건 회장은 자신의 고향인 수원을 중심으로 평생 사업을 하면서 수원 지역사회에 공헌했고, 직물업계 발전을 위해 발벗고 나섰다. 이런 그의 노력은 단순히 지역사회나 업계의 갈등 해소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과 업계 종사자의 삶의 질 향상으로 이어졌다.
그가 실천했던 이러한 가치는 선경이 소비자는 물론 지역사회에 신뢰받는 기업이 되도록 했으며, 이는 한국 사회의 또 다른 희망으로 뻗어나갔다.
“기업 경영에서는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 첫째도 인간, 둘째도 인간, 셋째도 인간이다. 기업 경영에서 가장 역점을 둬야 하는 것은 인간위주의 경영이며, 이를 위해 사람을 사람답게 다룬다는 기본 원칙을 철저히 준수해야 한다.” - 최종현 선대회장, 1980년 7월 전경련 강연에서
최종현 회장은 경영 초기부터 계열사 사장에게 결재권을 위임하며 서류에 회장 결재란을 두지 않았고, 1970년대 말에는 출퇴근 카드도 없앴다. “일을 맡기지 않으면 책임도 지지 않는다”, “우리는 세일즈맨이 아니라 비즈니스맨이 돼야 한다”라는 철학으로 직원들이 자율적으로 업무에 임할 수 있도록 했다.
‘생산성’을 중시하던 시대, 최종현 회장은 “기업의 힘은 사람으로부터 나온다”고 믿으며 사람을 가장 중시했고, 특히 사람의 자율성을 최대한 인정하고자 하였다.
1980년대말 민주화 열기로 울산지역에 거의 모든 화학섬유 공장이 극심한 노사분규로 생산중단을 겪고 있을 때, 선경만 예외였던 것도 ‘노사는 한솥밥을 먹는 식구들’이라며 노동자를 인간적으로 대우하는 최종현 회장의 오랜 철학에 기인했다.
최종현 회장의 인간 중심 경영의 일면은 대한석유공사와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했을 때 여실히 드러났다. 그는 “임직원들의 삶의 터전을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경영에 보탬을 얻고자 하지는 않는다”며 임직원 전체를 해고하는 사람 없이 그대로 떠안았다.
또한, 그는 석유와 비교 되지 않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인간 자원’을 통해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되고, 나아가 후손에게 좋은 결과를 물려줄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런 그의 믿음은 대한민국 인재 양성의 요람으로 성장한 한국고등교육재단 설립으로 이어졌다.
최태원의 '행복 경영'으로 이어진 SK 고유의 DNA
1953년전쟁의 상흔으로 뒤덮인 최빈국 대한민국에서 최종건 창업회장은 잿더미 속에 흩어진 부품을 손수 조립하며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패기’로 선경직물을 창업했다.
그로부터 20년 후인 1973년, 형의 유고로 최종현 선대회장이 기업을 승계했을 때 지정학적 위기와 석유파동으로 사업은 존폐 위기에 직면했다. 최종현 선대회장의 ‘지성’은 위기 상황을 오히려 체질 개선과 도약의 기회로 삼았다.
SKMS정립, 유공 인수 및 수직계열화 완성, 정보통신사업 진출 등을 통해 SK는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는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이처럼 두 거목의 ‘패기’와 ‘지성’은 무수한 어려움과 위기의 순간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만들며, SK 70년 역사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같은 SK 고유의 DNA는 현 최태원 회장 시대까지 이어졌다. 25년 전 취임한 최태원 회장은 취임 당시부터 일관되게 ‘행복 경영’이라는 화두를 제시하고 다양한 방법론을 진화시켜 왔다. 또한 시대 변화와 시장 흐름을 선제적으로 그룹 경영에 반영하며 미래 성장을 위한 과감한 변화와 도전을 결행해왔다.
그 결과 SK는 바이오·배터리·반도체를 중심으로 비즈니스 포트폴리오의 혁신을 거듭하며 외형의 성장뿐 아니라 질적인 변화를 이뤄냈다. 아울러 사회적 가치와 ESG경영을 선도적으로 추진하며 세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도전을 지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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