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그대는 어떤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가

2023. 4. 6.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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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길원 청란교회 담임목사·하이패밀리 대표

대학 수업시간에 교수가 말한다.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 된다. 하지만 세계 어느 언어에도 ‘긍정의 긍정’이 부정이 되는 경우는 없다.” 학생이 중얼거린다. “잘도 그러겠다.” 이럴 때 우리는 ‘헐’이라 반응한다. 우리말을 보면 끝이면 ‘끝’이지 ‘끄트머리’는 또 뭔가. 끝에서 새로운 시작을 보았던 셈이다. 조상의 번뜩이는 혜안을 본다. 삶과 죽음을 한 단어로 묶은 ‘죽살이’는 어떤가. 시집살이·살림살이처럼 죽고 사는 일을 하나로 봤다. 언어 속에 새겨진 놀라운 삶의 철학이다.

그런데 이토록 아름다운 언어를 가진 우리네 삶의 현장은 어떨까. 2018년 2월 시행된 ‘연명의료결정법’이 5주년을 맞았다. 그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사전연명 의료 의향서는 한국 사회에서 존엄사의 첫 분기점이었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등록자는 157만여 명이다. 19세 이상 성인 인구의 3.6%, 65세 이상 노인의 13.1%다.

「 연명의료결정법 시행 5년 지나
대부분 벼락치기로 최후 결정
‘어떻게 죽을까’로 바꿔 물어야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문제는 연명의료 중단을 선택한 25만6377명 중 21만2515명(약 83%)이 벼락치기로 마지막 결정을 내린다는 점이다. 10명 중 8명꼴로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도 남기지 못한 채 이별했다. 이를 존엄사라 할 수 없다. 대학 입시는 12년의 준비로도 모자라 재수, 삼수까지 하면서 죽음의 준비는 여전히 후진국 수준이다.

한국인은 66~83세까지 17년, 삶의 5분의 1을 각종 질병에 시달린다. 주렁주렁 기계장치를 달고 콧줄로 영양 공급을 받으며 최대한 서서히 죽어간다. 죽음은 집이 아닌 요양시설과 종합병원 응급실이나 중환자실에서 맞이한다. 4명 중 3명꼴이다.

네덜란드의 병원 사망률은 29.1%, 스웨덴은 42%다. 미국의 43%, 영국의 49.1%와 비교해도 대한민국은 지나치게 높다. 2020년 기준 암 사망자의 호스피스 완화 의료기관 이용률은 23%로다. 영국(95%)과 미국(50.7%)뿐 아니라 대만(30%)보다 낮다.

에드워드 제너는 개업의로 활동한 영국 의사였다. 고향 마을에서 젖소의 젖을 짜다 우두(牛痘)에 걸린 적이 있는 여인이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는 “왜 젖 짜는 여자들은 천연두에 안 걸리지”라며 의문을 던졌다. 일반인은 “왜 사람들은 천연두에 걸리지”라고 묻는 것과 달랐다. 창의적 질문 하나가 인류를 천연두에서 구했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 ‘죽음 지수’가 꼴찌다. 이 부끄러운 수치에서 벗어나는 길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어떻게 죽을 것인가’로 질문을 바꾸는 데서 시작된다. 시인 이문재는 말했다. ‘죽음을 살려내야 한다/ 죽음을 삶 곁으로/ 삶의 안쪽으로 모셔 와야 한다.’ 웰빙이 아닌 웰다잉을 말하는 순간 인식에 변화가 온다. 일상의 삶에 죽음을 끌어들이고 죽음과 친해져야 죽음조차 행복하게 맞이할 수 있다. 그게 ‘죽살이’다.

필자는 구세군과 함께 ‘앰뷸런스 소원 재단’을 운영하고 있다. 임종을 눈앞에 둔 ‘교통 약자’들의 생애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는 일이다. 소아암을 앓는 자녀들도 있다. 어린아이들은 자신에게 찾아온 죽음의 정체를 알고 받아들인다. 마지막 소원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하는데 부모들이 큰 걸림돌이다. “그러면 내가 아이들을 포기하란 말이냐”고 대꾸한다. 미국사회에서는 직장 동료들이 휴가를 기부한다. 동료의 배려로 자녀를 위한 돌봄 시간을 갖는다. 여행을 가장 많이 한다. 추억 유산 쌓기다. 우리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잠은 깨어나게 될 죽음이다. 죽음은 깨어나지 못할 잠이다. 이래서 죽음을 영면(永眠)이라 하고 잠을 숙면(熟眠)이라 부른다. 잠과 죽음은 신기하리만큼 닮았다. 쾌면이 건강을 보장하듯 준비된 죽음이 인생을 존엄하게 한다. 누가 죽음을 실패라 했는가. 모든 인생은 필멸자(必滅者)다. 진짜 실패는 산죽음이나 개죽음이다.

이제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 “나도 존엄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그래야 사후 장례식이 아닌 사전 장례식이 늘어날 것이다. 살아서 화해하고 작별인사하고 따뜻한 밥 한 그릇 나누고 떠나는 ‘엔딩 파티’ 말이다. 다가오는 부활절이 우리에게 묻고 있다. “그대는 어떤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가.”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송길원 청란교회 담임목사·하이패밀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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