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양곡관리법
한국인에게 쌀과 밥은 각별하다. “밥 먹었어?” “밥 꼭 챙겨 먹어” 등 안부 인사에 밥이 빠지지 않는 나라다. 2011년 오세훈 서울시장을 물러나게 한 것도 밥이었다. 당시 오 시장은 일괄적 무상급식에 반대해 부친 주민투표가 부결되자 자리를 내놨다. 그는 “공교육 강화를 위해선 학교 시설 개선, 원어민 교사 확충, 방과후 프로그램 강화 등에 예산이 필요하니, 선별적 복지를 하자”고 호소했지만 “애들 밥 먹이는 것으로 치졸하게 군다”는 선명한 한 줄 공격을 넘지 못했다.
쌀은 한국인 정체성의 상징이다. 쌀의 차별성은 1990년대 우루과이라운드(UR) 당시 또렷하게 드러났다. 그때 김영삼 대통령은 UR 협상에서 “쌀 한 톨이라도 개방하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며 쌀 예외주의를 내세웠다. 결국 쌀 시장 개방을 10년 유예하는 방식으로 협상이 타결되자 김 전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를 했다.
쌀과 밥에 대한 이 같은 각별함에도, 한국인의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1970년(136.4㎏) 정점을 찍은 뒤 감소세다. 지난해엔 56.7㎏으로 50년 만에 절반 넘게 줄었다. 이미 쌀은 심각한 과잉생산 상태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지난해 12월 보고서에 따르면, 양곡관리법 개정안(양곡법) 도입 시 2030년 쌀 초과 생산량은 63만톤을 넘어선다.
세계적으로도 쌀은 감산과 개량의 대상이다. 최근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쌀농사가 토양 산소를 고갈시키고 메탄 방출 박테리아를 촉진해 기후위기의 주범이라고 지적했다. 또 백미는 빵이나 옥수수보다 사람을 더 살찌게 하고 영양가가 적어 당뇨병·영양실조를 일으킨다고 했다. 벼 품종 개량, 농민 보조금 지급 중단 등 현재의 쌀농사 관행 개선이 시급하다고 제안했다.
사법 리스크에 둘러싸인 야당 대표는 1호 법안으로 양곡법을 추진하며 ‘한국인의 영혼’ 같은 쌀과 밥을 건드렸다.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1호 거부권으로 이를 저지하자, 정치권은 민심·농심 논쟁에 한창이다. 쌀과 밥에 대한 애틋함이 연료가 돼 총선 정국까지 타오를 분위기다.
이미 데이터는 쌀 과잉생산이 기후위기에도, 나라 살림에도, 국민 건강에도 유익하지 않다고 가리키고 있다. 이제 쌀과 밥에 대한 감상을 걷어내고, 숫자와 데이터로 판단할 때가 됐다.
박형수 국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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