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논강압’ 상권, 잘나가는 비결…논현·강남 ‘의료 메카’ 로데오 ‘신구 조화’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며 오히려 두각을 나타낸 상권이 있다. 바로 ‘가·논·강·압’이다. 빅데이터 전문기업 나이스지니데이타에 따르면 신사동 가로수길, 논현역, 강남역, 압구정로데오 등 강남에 포진한 상권이 2019년 대비 2022년 매출이 가장 많이 늘어난 서울 주요 상권 1위부터 4위까지를 휩쓸었다.
매출이 늘어난 것은 비슷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상황이 저마다 조금씩 다르다. 점포 수와 결제 건수는 되레 줄어든 곳도 있고 특정 업종에 쏠림 현상이 너무 강한 곳도 있다. 매출이 잘 나오는 시간대와 요일이 많이 달라지기도 했다. 팬데믹 이후, 강남 상권의 변화상을 분석했다.
가로수길: 뷰티·외식 ‘쌍끌이’
낮에는 ‘병원’, 저녁엔 ‘먹자골목’ 북적…이면도로 상권도 ‘방긋’
서울에서 가장 ‘핫’한 상권에 ‘가로수길’이 뽑혔다. 팬데믹에도 불구하고 2019년 대비 2022년 매출이 오히려 4069억원 늘었다. 의료 서비스와 외식업이 고르게 활기를 띠면서 2000년대 서울 상권을 호령하던 ‘절대 강자’ 모습을 되찾은 분위기다.
‘의료 서비스’가 전체 상권을 끌어가고 있다. 업종별로 살펴보면 ‘성형외과’ 매출이 가장 많이 올랐다. 2019년 2242억원에서 2022년 3651억원으로 무려 1400억원 넘게 늘었다. 성형외과뿐 아니다. 2위 일반 병원(641억원), 3위 안과(525억원), 4위 치과(384억원), 5위 약국(190억원), 6위 피부과(154억원)까지. 상위 10개 업종 중 6개가 의료, 그것도 대부분 뷰티·미용과 관련된 병원들이다.
배경에는 급증한 ‘시술 수요’가 있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 동안 보톡스·필러 등 미용 목적의 ‘에스테틱’ 수요가 크게 늘었다. 덕분에 대부분 상권과 달리 팬데믹을 거치면서도 연간 매출이 한 번도 줄어든 적이 없다. 2022년 성별·연령대별 매출 비중을 살펴보면 뷰티·미용에 관심이 많은 30대와 40대 여성이 전체 30%가 넘는다. 2019년 대비 오전 9시~오후 12시 사이 매출이 가장 많이 증가한 것도 여기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시술 특성상 오후보다는 오전에 수요가 몰리기 때문이다.
‘병원’만 웃은 건 아니다. 상권 활성화 척도로 꼽히는 ‘외식업’ 매출도 크게 늘었다. 한식 백반(101억원), 일식(71억원), 바·카페(70억원), 커피 전문점(69억원)까지 고른 증가세를 보였다. 특히 바·카페는 3년 동안 23억원에서 92억원까지 3배 넘는 매출 증가세를 보이기도 했다.
외식업 매출을 견인한 것은 가로수길 메인 옆에 위치한 ‘이면도로 상권’이다. 지하철 3호선 신사역과 가로수길 서편 사이에 위치한 이면도로 ‘세로수길’, 동편 이면도로인 ‘나로수길’을 넘어 나로수길보다 한 블록 더 동편으로 떨어진 곳에 위치한 ‘다로수길’까지 외식 상권이 확장 중이다.
특히 세로수길 남쪽은 인근 직장인 ‘회식 성지’로 변모했다. 벌집꿀막걸리로 유명세를 떨치며 단번에 가로수길 최고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신사전’, 삼각지 유명 고깃집 ‘몽탄’ 조준모 대표가 운영하는 해장국 프랜차이즈 ‘달래해장’ 등 팬데믹 때 새로 생긴 매장들이 인기를 얻으며 유동인구를 세워 잡는다.
신사전에서 만난 직장인 김동훈 씨(가명)는 “1차 식사는 물론 2차 술자리로도 괜찮은 매장이 많이 늘어났다. 회사에서 가까운 데다 신분당선 개통 덕분에 다른 지역에 있는 친구들과 접선 장소로 잡기도 좋다”고 말했다.
상대적으로 지하철역과 메인 거리에서 떨어져 있는 나로수길, 다로수길도 분위기가 나쁘지 않다. 뷰티·미용에 관심이 많은 손님을 겨냥한 다양한 형태의 라이프스타일 매장이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다. 골프 용품점과 디저트 카페를 함께 운영하는 ‘꼬르르’, 캔버스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드로잉 카페 ‘경성미술관’ 등이 대표적이다.
다로수길에서 프리미엄 티룸 ‘맥파이앤타이거 신사티룸’을 운영하는 김세미 대표는 “다로수길을 비롯한 가로수길 상권은 식음료는 물론 예술, 문화, 뷰티까지 라이프스타일 트렌드를 이끄는 곳으로 예전부터 눈여겨보고 있던 지역이었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1년 4월 문을 열었는데, 오픈 때부터 지금까지 손님이 꾸준히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승승장구 중인 가로수길에도 고민은 있다. 여전한 ‘공실’ 문제다.
가로수길이 핫하다지만 아직도 메인 거리에 ‘임대 문의’ 딱지가 붙은 공실 건물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워낙 비싼 임대료가 걸림돌로 작용하는 중이다. 가로수길 먹자골목에 위치한 A공인중개사사무소 대표는 “코로나 팬데믹 때 빠져나간 대기업이 많아 ‘통임대’를 내놓은 건물이 여럿이다. 자리는 좋지만 액수가 워낙 높아 일반 자영업자는 불가능하다”며 “건물주가 매장을 쪼개 세를 주거나 임대료를 낮추는 등 양보를 해야 공실 문제가 해결될 텐데, 쉽지가 않다”고 말했다.
영동시장 먹자골목 ‘바글’…밤 손님은 줄어
2위 ‘논현역’ 상권은 언젠가부터 ‘의료의 메카’가 된 모습이다. 매출 증가 상위 업종 10개 중 8개가 모두 병원이다. 성형외과·안과·약국·비뇨기과·정형외과를 비롯해 한방병원과 비만관리까지, 종합병원을 방불케 한다.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최근 결정된 ‘논현역 병기 이름’이다. 현재 논현역 이름 밑에는 ‘강남브랜드안과역’이라는 이름이 함께 기재돼 있다. 지난해 서울교통공사가 진행했던 ‘역명 병기 판매 사업’에서 역대 최고가인 9억원에 낙찰됐다. 거액을 투자해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매출이 잘 나오고 경쟁이 치열하다는 얘기다. 특히 ‘안과’ 매출이 기괴하리만치 많이 늘었다. 2019년 169억원에서 2022년 967억원까지 5배 넘게 증가했다.
하지만 가로수길 상권과 다른 점이 있다면 ‘외식업 부진’이다. 매출 증가 상위 10개 업종에서 외식은 ‘양식’만 10위로 겨우 턱걸이한 상황이다. 오히려 매출이 줄어든 업종이 많다. 호프·맥주 매출은 111억원 넘게 줄었다. 한식·백반(57억원), 유흥주점(53억원), 낙지·오징어(41억원), 치킨(28억원)도 비슷한 상황이다.
실제로도 외식업이 어려울까. 지난 3월 29일 저녁 7시 30분, 논현역 영동시장 먹자골목 상권을 찾았다. 곱창 전문점, 돼지고기 전문점 위주로 가게마다 손님으로 가득하다. 골목 어디를 방문해도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에 정신이 없을 지경. 수치에서 나타나는 ‘외식업 부진’을 체감하기 어려웠다.
문제는 밤 10시 이후부터다. 그 많던 손님이 거짓말처럼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금세 한가한 골목으로 전락한다. 일찍 자리를 뜨는 1차 손님은 많고 밤늦게 유입되는 2차 손님은 부족한 탓이다.
이런 현상은 데이터에서도 나타난다. 2022년 논현역 상권 오후 6~9시 매출은 2019년 대비 593억원 늘었다. 반면 밤 9~12시 매출은 153억원 감소, 밤 12시부터 다음 날 오전 6시까지는 364억원이나 줄었다.
논현 영동시장 먹자골목에서 13년째 고깃집을 운영하는 한상혁 씨(가명)는 “물가가 오르고 경기가 안 좋아지면서 밤 손님과 새벽 손님이 많이 없어졌다. 택시비 부담에 최근 인상한 소줏값도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며 “이건 비단 논현뿐 아니라 서울 상권 전체가 겪고 있는 문제”라고 한숨 쉬었다.
점포 수·결제 건수↓…신사·논현에 손님 뺏겨
강남역 역시 논현역과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다. 매출 자체는 2조8600억원에서 3조3970억원까지 급증했다. 절대적인 액수만 따지고 보면 2위 가로수길(약 1조4000억원)보다 2.5배나 큰 상권이다. 겉은 화려해 보이지만 속사정을 살펴보면 얘기가 다르다.
강남역 상권 점포 수는 3년 동안 2559개에서 2380개까지 170개 넘게 줄었다. 결제 건수도 5900만건에서 5100만건까지 감소했다.
점포 수와 결제 건수가 줄었는데 매출이 늘었다는 사실이 뜻하는 바는 명확하다. 매장이 대형화·고급화되면서 객단가가 높아졌다는 얘기다. 강남역 상권 특성에 비춰보면 결국 비용이 큰 ‘병원’으로 매출이 집중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강남역은 매출 증가 상위 10개 업종 중 9개 업종이 의료 관련 업종이다. 안과, 성형외과, 병원, 피부과, 약국 등 매출이 크게 올랐다. 유일하게 순위권에 이름을 올린 비의료 업종은 다름 아닌 ‘해장국’. 하지만 이마저도 상권에는 희소식이 아니라는 게 전문가 설명이다.
주시태 나이스지니데이타 실장은 “강남역 상권은 유일하게 한 그릇 메뉴인 국밥 매출 증가가 두드러진 상권이다. 객단가가 낮은 일상식 소비가 늘어난다는 것은 상권 전체 활성화 관점에서 볼 때 좋은 신호가 아니다”라며 “중심 상업지구가 아닌 평범한 평일 오피스 상권으로 전락하는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가·논·강·압 4개 상권 중 유일하게 주말인 토요일, 일요일 매출이 모두 감소했다는 점도 상권 입장에서는 우울하다. 2022년 강남역 상권 토요일 매출은 2019년 대비 0.4%, 일요일 매출은 24%나 줄었다. 저녁 매출도 부진하다. 밤 9시부터 12시까지 매출은 29.4%, 12시부터 다음 날 아침 6시까지 매출은 67.8% 감소했다.
강남역에 위치한 한 대기업에서 근무하는 박진우 씨(가명)는 “점심은 강남역 근처에서 먹지만 저녁은 가로수길이나 압구정로데오, 교대 인근 음식점을 찾는다. 판교에서 근무하는 친구들과 약속을 잡을 때도 과거에는 어쩔 수 없이 강남에서 약속을 잡았다면, 이제는 신분당선도 뚫린 마당에 신사나 논현을 가는 일이 훨씬 늘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주시태 실장은 “선릉역은 유흥주점, 호프·맥주, 룸살롱, 주차장 매출이 급감한 반면 한식·백반이나 카페·브런치 업종 매출은 늘었다. 전형적인 유흥 상권에서 오피스 상권으로의 변화가 포착되고 있는 셈이다. 매출을 보장하는 대형 병원이 없다고 가정하면 강남도 선릉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압구정로데오: 다양한 포트폴리오
주말 매출 증가 유일…명실상부 ‘핫플’
압구정로데오는 다양한 포트폴리오에 힘입어 선전한 케이스다. 비교적 크지 않은 상권임에도 불구하고 외식을 비롯해 카페, 주점, 의료, 패션, 전시 등 다양한 업태의 매장이 오밀조밀 골고루 자리 잡고 있다.
의료 매출이 두드러진 타 지역 상권과 달리 외식 업종도 힘을 냈다. 특히 최근 MZ세대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바·카페’가 무려 8000%가 넘는 성장을 보였다. 2019년 3억원이 채 안 됐지만 2022년에는 232억원에 달했다. 이 밖에도 양식(131억원), 한식·백반(102억원), 커피 전문점(65억원) 등이 고른 성장을 보였다.
포트폴리오가 다양한 덕분에 요일이나 시간대별 매출도 고르게 나타난다. 압구정로데오는 주말 매출 증가가 평일보다 큰 유일한 강남 상권이다. 2019년 대비 2022년 토요일 매출 증가폭이 388억원으로 평일 평균(288억원)보다 100억원 가까이 크다.
김도훈 나이스지니데이타 연구원은 “압구정로데오는 ‘종합 상권’이다. 인근 가로수길처럼 의료 서비스 매출이 강세를 보이는 동시에 커피 전문점이나 가볍게 음주를 즐길 수 있는 형태의 ‘바’ 매장도 매출이 잘 나온다”고 설명했다.
최근 압구정로데오에 다양한 매장이 들어서게 된 배경에는 ‘저렴한 임대료’가 있다. 전통의 강자들은 코로나 팬데믹에도 생존, 그대로 자리를 지켰다. 물론 팬데믹 기간 동안 공실도 많이 생겼다. 하지만 위기감을 느낀 건물주들이 임대료를 낮추면서 공실마다 새로운 카페나 식당이 많이 입점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신구 조화’다.
압구정로데오에서 B공인중개사사무소를 운영하는 김민희 씨(가명)는 “낮에는 ‘꽁티드툴레아’ ‘누데이크 하우스 도산’ ‘카페 노티드’ ‘도산분식’ 같은 매장이 사람을 끌어모은다면 저녁에는 각종 술집과 클럽마다 손님이 북적인다”며 “시간대별 인기 매장이 적절히 분산돼 있는 덕에 하루 종일 사람이 많다”고 설명했다.
다만 너무 오른 임대료와 권리금은 예비 창업자 입장에서는 리스크다.
익명을 요구한 한 외식 업체 대표는 “압구정로데오 상권에 막대한 자본을 투입한 ‘퀄리티’ 좋은 매장들이 대거 들어서면서 최근 임대료와 권리금 경쟁도 과열 양상을 띤다. 마치 ‘힙’한 매장들 사이에 전쟁이라도 일어나고 있는 느낌”이라며 “어쭙잖은 생각과 애매한 자본 규모로 압구정로데오 상권에 뛰어들면 낭패를 볼 것”이라고 말했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03호 (2023.04.05~2023.04.1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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