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주를 으깨다 보면 알게 된다, 엄마 팔뚝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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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은주 기자]
▲ 된장, 간장을 위해 잘 익은 메주 |
ⓒ 노은주 |
매일 반복되는 일상속에서 계절은 그저 숫자의 변화로만 인식될 뿐이다. 1월에는 설날이 있고, 5월에는 어린이날과 석가탄신일이 있다. 계절의 변화와 상관없이 쉬는 날만을 가장 먼저 기억하는 것이다.
이런 때에 메주 건지는 날을 헤아리며 바람과 햇빛의 온도를 살피고 있는 나는 시대를 거스르는 사람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아니 시대를 거스르는 걸 알면서도 변함없이 그 일을 행하니 어리석다고 해야 할까.
챗GPT가 대세로 떠오르고 있는 시기에 간장, 된장이나 얘기하고 있으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이러니 나같은 사람을 두고 세상 사람들이 곰팡내나 푹푹 풍기는 진부하고 고루한 사람이라 하겠지. 트랜드를 무시한 시대의 역행자라고 떠들면서.
또 누군가는 효율성을 따져가면서 요즘에는 간장, 된장 같은 건 만들어 먹는 것보다 사 먹는 것이 더 생산적이라고 말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누가 그걸 몰라 손수 간장, 된장을 담그며 세련되지 못한 이름을 몸에 걸치려 할까.
나도 이런 음식들이 구시대의 산물이 되어 우리에게서 점점 뒷걸음 치고 있다는 것쯤은 안다. 과거의 영예 따위는 이미 도심 속 어딘가로 꼭꼭 숨어 찾아보기조차 힘들어졌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그 일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이 있기에, 그들을 위안 삼아 나도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 간장과 된장을 만들었을 때를 떠올려 본다. 그때 난 간장의 갈색이 항아리에 넣어둔 숯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숯을 넣어두기에 말갛기만 한 소금물이 갈색으로 변한다고. 한마디로 장 만드는 일 따위엔 젬병이었단 말이다. 그런 내가 이제는 발효라는 느림이 만들어내는 경이로움을 알게 되었다. 메주와 시간이 만들어내는 오묘한 맛을 이해한 것이다.
글로 간장, 된장 만드는 법을 쓰는 일은 쉽다. 갈색으로 변한 소금물에서 메주를 건져 으깨고, 메주를 건져낸 소금물은 가는 채로 깔끔하게 걸러 끓여 내기만 하면 되니 말이다. 그러면 메주는 된장이 되고, 소금물은 간장이 된다. 이 쉬운 걸 누가 못하겠는가.
하지만 메주를 으깨다 보면 안다. 우리네 할머니와 어머니들의 팔뚝이 왜 그렇게 튼실하고 억셌는지. 한번은 메주를 으깨는 일이 힘들어 믹서기에 갈아버린 일이 있었다. 그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 메주를 넣어서 갈고, 갈린 메주를 파낸 후 다시 갈고. 그것이 번거로워 지금은 힘이 들어도 손으로 으깨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지난 일요일에는 메주를 건져 간장과 된장 만드는 일을 했다. 내가 메주를 으깨서 된장을 만들면, 남편은 소금물을 끓여 간장을 만들었다. 내가 하는 일은 남편이 하는 일보다 수월했다. 난 앉아서 메주를 으깨기만 하면 됐지만, 남편은 간장이 끓으면 다른 그릇에 옮기고, 다시 간장을 끓여 다른 그릇에 옮기기를 반복해야 했다.
으깬 메주를 항아리에 차곡차곡 담아 토닥토닥 다독였다. 그 위에 소금을 휘휘 뿌리며 맛있는 된장이 되라고 빌었다. 이제 온몸으로 숨을 쉬어야 하는 항아리의 몫만이 남았다. 내 옆에서는 남편이 한소끔 끓인 간장을 스테인레스 대야에 부어 식히고 있었다. 앉은뱅이 의자를 가져가 남편 옆에 나란히 앉아 간장의 열기가 식기를 기다렸다. 그때 남편이 말했다.
"난 이런 일이 참 재밌더라. 힘들게 일하고 일한 것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기분이 너무 좋아."
내가 지금껏 계절의 변화를 느끼며 날씨를 살폈던 건 순전히 남편 덕이다. 비록 지금까지의 수고를 생각한다면 남편 덕이라고만 하기엔 다소 억측스런 면이 없잖아 있지만, 그래도 이런 음식이라도 만들게 해 준 사람이 남편이니 '때문에'가 아니라 '덕'이라고 말하는 게 옳다.
요즘은 김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줄고 있다. 이러한 때에 집안의 손맛을 잇겠다며 장 만드는 일까지 하고 있는 나는 무언가 싶다. 이러다 정말 전통문화 전달자라도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선 안 된다. 진심이다. 그러다 내 음식 솜씨가 들통날 수도 있는 일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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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다음 브런치스토리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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