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 게 없다" 관객 불만…창고 쌓인 영화 90편 못 푸는 속사정
일본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와 ‘스즈메의 문단속’의 잇따른 흥행. 이에 앞서 천만 관객을 돌파한 할리우드 영화 ‘아바타: 물의 길’ 등 한국 영화계는 남의 나라 영화의 잔치를 지켜보기만 하는 신세가 됐다. 극장 관객수 회복 또한 더디기만 하다.
지난 3월까지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에 집계된 올해 극장 관객수는 2514만7858명으로, 2019년 동기간(5507만 1869명) 대비 여전히 절반에 못 미치는(45.7%) 수준이다. 그간 국내 영화 시장의 절반을 견인해온 한국영화 대작이 실종된 탓이다.
관객들은 “극장에서 볼만한 한국영화가 없다”고 불만을 토로하는데, 정작 영화사들은 “관객이 줄어 개봉을 못하고 있다”고 한다. 업계에선 “다 만들어 놓고도 개봉일을 못 정한 한국영화가 90여편에 이르다 보니 신작영화에 대한 투자가 원활히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휴‧폐업 등으로 스크린 수가 감소해 극장가가 완전히 회복해도 연간 관객수가 역대 최다를 기록한 2019년(2억2667만명)의 70~80%대에 머물 수 있다는 분석과 함께다.
‘자전차왕 엄복동’(2019)을 시작으로 영화산업에 뛰어든 셀트리온은 지난해 영화부문을 정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극장 흥행 공식을 분석한 『영화 배급과 흥행』 저자인 제작사 하하필름스 이하영 대표는 “올해 연간 관객수가 지난해처럼 1억명 대에 머물면, 투자도 예년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져 시장 자체가 축소된 채로 고착화할 수 있다. 결국 한국영화 시장이 죽을 수도 있다”는 위기론을 내놨다.
지금보다 한국영화가 더 어려워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관객의 발길을 모을 한국영화 대작들은 왜 극장에 선뜻 돌아오지 못하는 걸까.
5월 '범죄도시3' 등판…한국영화 보릿고개 끊을까
지난해 2편이 천만 흥행을 거둔 '범죄도시' 3편(5월말 개봉), 류승완 감독의 범죄영화 ‘밀수’(여름 개봉 예정), 광복 직후 국제 마라톤 대회 실화를 그린 강제규 감독의 시대극 ‘1947 보스톤’(추석 개봉 예정) 외엔 개봉 시기를 잡지 못한 작품이 대다수다.
송중기 주연의 콜롬비아 무대 범죄 영화 ‘보고타’, 김용화 감독의 SF ‘더 문’, 김태용 감독의 SF ‘원더랜드’, 라미란 주연 코미디 ‘시민 덕희’ 등 화제작들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익명을 요구한 투자‧배급사 관계자는 “보통 여름‧겨울 대작영화의 개봉 시기는 잡아놓는데, 올해는 그 정도 계획도 못 세웠다”고 말했다. “관객 100만은 하겠다 싶던 영화가 20~30만으로 줄었다” “코로나 기간 만든 영화들을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에 원가로 판매하는 방법도 고려 중”이라는 등 다른 투자·배급사 관계자들의 하소연도 있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OTT 뜬다" 인식…극장 회복 늦춰
영화계는 OTT로 직행하는 콘텐트가 늘어난 것 만큼이나 홀드백이 붕괴한 것도 극장 정상화를 늦추고 있는 요인으로 본다. 홀드백은 극장 상영이 끝난 후 다른 플랫폼 출시까지 걸리는 기간을 뜻하는 말로, 관행적으로 45일이 지켜져 왔지만, 팬데믹 이후 빠르면 2주, 늦어도 한 달 정도면 극장 동시 출시되는 개봉작이 늘어나며 유명무실해졌다. 이에 따라 관객들의 관람 습관도 바뀌었다. 극장에 안 가도 조금만 기다리면 OTT로 개봉작을 볼 수 있다는 인식이 생겨난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제작사 관계자는 "OTT가 투자‧배급사로부터 100억대 작품을 구매할 때 다른 작품까지 패키지로 계약하며 홀드백에 관한 조건을 내건다고 들었다"면서 "당장 자금을 회수해 회사를 굴려야 하기에 거절하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홀드백에 대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팬데믹 기간 세 차례 오른 극장 관람료 인상 또한 극장 정상화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의견도 있다. 운영난을 겪는 극장들에겐 자구책이 됐지만, 가격 부담으로 인해 관객이 줄고 영화에 대한 평가가 더욱 박해졌다는 것이다.
한국 영화 대작이 극장에 대거 돌아오기까진 시간이 걸릴 거란 전망이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인상된 극장 관람료를 낮추는 게 사실상 불가능한데다, 극장가 회복의 바로미터가 될 '범죄도시3'의 흥행성적을 본 뒤 묵혀둔 자사 영화들의 배급을 결정하겠다는 투자·배급사들이 관망세 때문이다.
영화계 관계자는 "코로나 기간 중 제작된 한국 영화들은 여러 악조건 속에서 만들어졌기에 영화사들이 작품의 퀄리티를 자신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게다가 고퀄리티의 OTT 콘텐트에 익숙해진 관객들의 눈높이가 높아진 것도 영화사들을 더욱 부담스럽게 하는 요인"이라고 말했다.
이번 위기를 영화계 체질 개선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영화평론가는 "관객 눈높이를 충족하지 못하는 작품이 많은 게 현실이지만, 이런 영화들이 외면 받는 게 장기적으로 기회가 될 수 있다"면서 "상투적인 영화를 만들어 놓고 '관객이 좋은 영화를 몰라 준다'며 자아도취에 빠져 있는 일부 영화인들이 이번 기회에 각성한다면 한국 영화는 위기를 딛고 도약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범죄도시3’, ‘1947 보스톤’ 등을 만든 비에이엔터테인먼트 장원석 대표는 “극장 영화도 재밌으면 관객이 보러 온다고 믿는다”면서 “많은 사람이 함께 공감하고 즐기는 극장 영화 만의 재미는 여전히 존재한다”고 강조했다.
나원정·남수현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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