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T 시리즈도 영화, 콘진원 업무 가져오겠다…위원장직 걸고 전쟁 시작”
“코로나19 기간 개봉하지 못한 영화가 아직도 90편 넘게 쌓여있습니다. 문제는 이 영화들이 개봉하지 못하면, 투자자가 자금을 회수할 수 없어 신작 투자도 줄어드는 악순환이 거듭된다는 겁니다. 영화산업 전체가 ‘동맥경화’에 걸린 상태입니다.”
지난 4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 영화교육지원센터에서 만난 박기용(62) 위원장은 최근 부쩍 ‘위기론’이 불거진 한국영화 산업의 현실을 이렇게 요약했다. 올해 영진위 창립 50주년이라는 기념할 만한 해이지만, “팬데믹 와중이던 지난해보다 엔데믹에 접어든 지금 더 큰 위기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는 위기를 넘기 위해 그간 고민해온 방안들을 거침없이 꺼내놓으며 “내 직을 걸고 하는 이야기다” “전쟁이 시작됐다” 같은 절박한 표현들을 동원했다.
“한국 영화계, 안일했다”
박 위원장이 말하는 한국영화 위기는 몇 가지 수치로 쉽게 확인된다. 지난해 전체 극장 매출액(1조 1602억원)이 팬데믹 이전인 2019년 대비 5분의 3(60.6%) 수준에 불과했고, 전체 관객 수 역시 2019년의 절반(49.8%)에도 미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올해 1분기에는 일본 애니메이션 두 편(‘더 퍼스트 슬램덩크’, ‘스즈메의 문단속’)이 잇따라 선전하면서, 그간 매출액의 절반 이상을 외화에 내준 적 없던 한국영화의 매출액 점유율은 역대 최저 수준인 29.2%로 주저앉았다.
박 위원장은 이런 상황에 대해 “코로나19 기간 동안 비싸진 극장 요금, OTT의 확산 등 복합적인 요인으로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문화 자체가 무너졌다”면서도 “하지만 ‘슬램덩크’의 사례에서 보듯 관객들은 여전히 영화가 흥미로우면 줄을 서면서도 보러 온다. 과연 한국영화 중에는 그럴만한 작품이 있었나? 그렇지 않았다”고 냉정하게 평했다. “영진위뿐 아니라 한국 영화계가 그간 너무 안일했습니다. 작품이 흥행하지 못하면 자신을 돌아보는 대신 외부 탓만 해왔죠. 뼈아프게 반성하고 달라져야 합니다.”
“한국 IP 빨아가는 OTT, 영발기금 부과해야”
그는 투자와 제작·배급이 밀접하게 맞물리며 유지돼온 순환 구조가 깨진 현 상황은 “영진위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며 정부의 지원을 호소했다. 현실적으로 고갈 직전의 영화발전기금을 확충해 달라는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지만 “지금의 절박감은 여느 때와 다르다”는 것이다. 한국영화 진흥 등의 명목에 쓰이는 영화발전기금은 티켓값의 3%를 징수해 적립하는 부과금이 주요 재원인데, 극장 관객 수가 줄면 자연히 부과금이 따라 줄면서 당장 올 연말이면 기금이 바닥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극장 부과금 외의 다른 재원이 있어야 하는데, 이에 대해 박 위원장은 “정부의 국고 지원이 제일 간단한 해결책이지만, 어렵다면 ‘체육진흥기금’과 같이 비교적 여유 있는 다른 기금을 영화에 쓰도록 전환하는 방법도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박 위원장은 변화한 영화 유통구조에 맞게 OTT에도 영화발전기금을 부과해야 한다고 했다. 특히 글로벌 OTT 넷플릭스가 한국 영화계 인력이 참여한 시리즈물로 막대한 수익을 올리는 데 대해 “한국의 지적재산(IP)과 인력을 빨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며 “이미 프랑스·캐나다·덴마크 등 많은 나라가 OTT로부터 기금을 징수하고 있다. 우리도 법적 근거를 하루빨리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직 걸고 OTT 업무 가져올 것”
보다 근본적으로, 영화를 이제는 극장뿐 아니라 OTT에서도 보게 된 만큼, 영화의 개념은 물론 영진위의 역할도 확대돼야 한다는 생각을 밝혔다. 극장에서 관람하는 2시간 안팎의 콘텐트만이 ‘영화’가 아니라, 영화적 문법으로 제작된 영상물이라면 상영 시간이나 유통 플랫폼에 상관없이 넓은 범주의 영화에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OTT 시리즈와 영화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많지만, ‘사이트 앤 사운드’(시각·청각) 요소를 활용해 영화적 스토리텔링을 한다면 영화라고 볼 수 있다”며 “극장에서 보는 것만 영화라는 건 일종의 고정관념일 뿐, 세상이 바뀌었으면 영화의 개념도 바뀌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박 위원장은 이같은 영화 개념 재정립을 토대로, 현재 한국콘텐츠진흥원(콘진원)이 맡고 있는 OTT 시리즈물 관련 업무를 영진위가 가져오는 게 바람직하다는 다소 도발적인 아이디어도 제안했다. 각 기관의 업무를 재설정하는 복잡한 문제인 데다 콘진원 등 다양한 이해 당사자의 반대가 예상되지만 “‘전쟁이 시작됐다’고 표현해도 좋다. 한국영화 발전을 위해 내 직을 걸고 하는 이야기”라며 비장한 의지를 보였다.
“업무 과부하에 걸려있는 콘진원보다는 영화·영상을 전문으로 하는 영진위가 OTT 시리즈 업무도 맡는 것이 한국 영상 콘텐트 발전을 위해 훨씬 효과적이다. 영진위 9인 위원회 내에서조차 이런 생각에 반대가 많았지만, 1년간 설득한 끝에 합의에 이르렀다. 이 작업을 하지 않으면 한국 영화계가 정말 망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다른 장르를 제쳐두고 영화 먼저 살려야 한다면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박 위원장의 답은 뭘까. 그는 “음악, 식문화 등 모든 문화예술의 집합체인 K무비는 K컬처를 선도해왔으며, 한국의 국격을 높이는 데 기여해왔다고 믿는다”며 “재미없는 영화를 억지로 보러 와달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코로나19를 거치며 상황이 어려워진 영화계가 다시 기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조금만 시간과 기회를 주시면 좋겠다”고 말했다.
남수현 기자 nam.soohyo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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