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관련 번역소설로 곤욕

김삼웅 2023. 4. 5.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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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상식인 김자동 평전 46]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문제가 터졌다

[김삼웅 기자]

 1980년 9월 1일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제11대 대통령 취임식 모습
ⓒ 행정안전부 대통령기록관
 
진보성향의 전직 언론인이 황야에 나선 때는 바야흐로 박정희의 전성시대였다. 한국의 혁신계는 1차로 이승만에 의해 그리고 2차는 박정희에 의해 조용수와 <민족일보>가 짓밟히면서 '폐족상태'가 되고 말았다. 두 사건에 연루된 인사 중에는 독재자의 곤룡포 속으로 훼절한 자도 있었고, 시대를 탓하며 음지에서 바둑이나 두며 소일하는 인사들도 있었다.

김자동은 사업가의 기질도 못되지만 정치인의 성품도 아니었다. 4.19혁명 후 지인들이 혁신정당 참여를 권유하고, 공화당 창당시 요직을 제안받는 등 기회가 주어졌으나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혁신계 인사들과는 오랫동안 연을 유지해 왔다. 

특히 박정희의 곤룡포 자락을 거부한 채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유유자적한 태도를, 마치 중국 충징시절 임시정부 주변의 연로한 독립운동가들의 모습과 오버랩되어 틈나는 대로 찾곤 하였다. 특히 <민족일보> 기자 시절에는 자주 찾고 어울렸다. 

이즈음 시간이 많아서 우리 독립운동사 특히 임시정부에 관한 자료를 모아 공부하였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직접 조직한 대동단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느라 대학도서관과 고서점을 순회하였다. 어머님의 생애를 돌아보는 기록에도 공역을 들였다.

그러는 사이 불멸의 독생자인냥 군림하던 독재자가 암살되고, 그에 못지 않는 표독한 군인이 전임자의 수법대로 정권을 찬탈했다. 중년이 된 재야인사 김자동은 광기의 질주를 계속하는 5공권력의 수레바퀴에 제동하는 작은 역할이라도 하고 싶었다.

생계용으로 시작한 번역사업이 뜻있는 출판인 일월서각의 김승균을 소개받으면서 고통의 시간으로 이어졌다. 전두환 5공은 태생부터가 광주의 피바다를 이루고, 언론통폐합과 비판적 지식인·언론인들을 투옥하면서 악행이 진행중이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번역 일에 나선 것은 1984년 경이다. 

제일 먼저 건네받은 책은 <서클(The Circle)>이라는 미국소설이었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작가는 〈허슬러〉라는 영화의 대본을 쓴 스티브 샤건이라는 미국인이었다. 앞부분을 좀 번역하다 보니까 '아, 이거 문제가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는 전두환 신군부 권력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소설 내용이 '10.26사건'과 전두환을 다룬 것이었다. 주인공이 '춘(Chun)장군'인데 전두환의 전全(Chun)에서 따온 것이었다. 조금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일단 번역을 마쳤다.

그리고 얼마 뒤에 <π=10.26 회귀>라는 제목으로 책이 출간됐다. 나중에 이 책은 <죽인 자는 죽는다>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문제가 터졌다. 1984년 12월경, 팔이 아파 주사를 맞으며 통원치료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날도 막 병원에 가려던 참인데 일월서각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주석 1)

전두환 정권의 정보기관원, 검찰, 경찰은 대부분 박정희 정권의 '그때 그 사람들'이었다. 권력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이나 민주·진보인사들에 대한 적대감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어찌 보면 한낮 외국소설 번역이다보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던 사소한 일이었다. 하지만 대를 이은 충성배들은 먹잇감을 놓치지 않았다. 

'뭣 땜에 날 잡아가는 지 따질 건 따져야 되겠다.'

잠시 뒤 낯선 사람 몇이 우르르 집으로 들이닥쳤다. 그들 중 한 사람은 다짜고짜 내 눈을 가렸다. 나머지 사람들은 집에 있는 책을 잔뜩 내다 싣고는 나를 태워 어디론가 차를 몰았다. 제법 시간이 흐른 뒤에 차에서 내려보니 남산이었다. 나는 속으로 '중앙정보부구나!' 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거기는 당시 안기부라고 불리던 정보부가 아니라 치안국 대공분실이었다. 지하실에 나를 가두고 조사를 하는데 별로 물어볼 것이 없으니 인적 사항만 확인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어디론가 나를 데려갔다. 나중에 알고보니 옥인동 시경분실이었다. (주석 2)

경찰은 신분조사 끝에 언론인 출신임이 알려지면서 '유언비어 유포죄'로 10일 구류처분과 관련 서적을 전부 압수해갔다. 엉뚱하게 '언론인'의 혜택을 받은 셈이다.

주석
1> <회고록>, 426쪽.
2> 앞의 책, 4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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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상식인 김자동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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