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조리사 꿈꾸던 50대 은퇴남, 큰코 다치고 떠났습니다 [나의 막노동 일지]
저는 27년 간 종사한 기자생활을 끝내고 지난해 9월부터 노가다를 시작했습니다. 말로만 듣고, 눈으로만 스쳐지나가던 막노동을 하며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인생의 희로애락을 몸소 체득하고 있습니다. 몇 차례에 걸쳐 직접 겪은 땀의 현장을 전합니다. <기자말>
[나재필 기자]
▲ 대기업 반도체공장 증설현장에서 근로자들이 크레인작업을 하고 있다 |
ⓒ 우희철 |
50대는 참으로 당혹스러운 나이다. 가장으로서 한창 일할 나이이자 동시에 사회에서 퇴역을 준비해야 하는 '낀' 세대다. 아무리 장수 사회라 할지라도 쉰 살 중반으로 가다 보면 서서히 덜컹거리기 시작한다. 그저 가만히 있기도, 무엇을 해보기도 애매한 시간 속에서 절뚝거린다.
50대는 가장 써먹기 좋은 때지만, 가장 버려지기 좋은 때이기도 하다. 세월을 부여잡고 울어본들 소용없다. 아내와 자식들이 눈에 밟히고, 연로한 부모의 주름까지 챙겨야 하니 앉아있을 수만은 없다. 도망갈 수도, 도망가서도 안 되는 지천명 인생살이는 그래서 고달프다.
나는 기자 생활을 끝내고 곧바로 요리학원에 등록했다. 평상시 요리와 설거지하는 걸 좋아했고, 50대 이상의 재취업 자격증으로 인기가 높았기 때문이다. 펜 대신 칼을 잡았지만 한식조리사 꿈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재료 썰기, 콩나물밥, 비빔밥, 장국죽, 완자탕, 두부젓국찌개, 생선찌개, 홍합초, 생선전, 육원전, 표고전, 풋고추전, 화양적, 섭산적, 너비아니구이, 제육구이, 북어구이, 더덕구이, 무생채, 도라지생채, 더덕생채, 겨자채, 잡채, 탕평채, 칠절판, 미나리강회 등 31가지 요리를 마스터해야 하는데 칼만 잡으면 손이 덜덜 떨렸다.
얇게 썰고, 얇게 저미고, 얇게 부치고, 얇게 포 떠야 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또한 메뉴 전반에 사용하는 계란 지단을 만들 땐 남자의 굵은 손마디가 야속했다. 결국 필기는 가볍게 통과했지만 실기는 2회 연속 1점 차이로 낙방했다. 그리고 도망치다시피 취업한 곳이 대기업 직원 식당 주방 보조였다.
▲ 대기업 직원 식당 주방 보조일을 3개월 하고 지병 5개를 얻었다 |
ⓒ 픽사베이 |
이곳은 '여인천하'였다. 조리사와 식재료 전처리하는 사람을 빼면 남자는 나뿐이었다. 더구나 열 명 남짓한 여성들은 모두 60대 이상이었고 몸 성한 사람이 없었다.
나는 하루 2000~3000인분의 그릇을 닦았다. 작은 그릇과 접시, 밥공기는 대형식기세척기로 돌리고, 덩치가 큰 주물냄비, 밥통 등은 일일이 세제를 묻혀 설거지했다.
세제도 독한 것(실명 경고딱지 붙어 있음)이 많았고, 끓는 물에 손을 담가 고무장갑이 사흘을 못 버텼다. 더구나 7~9월 한여름 폭염 속에 세척 증기까지 뿜어져 나오니 숨이 턱턱 막혀 졸도 직전까지 갔다. 그럴 땐 동료가 얼음물 한 사발을 가져와 한 바퀴 돌렸다.
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컨베이어벨트 앞에 서면 기계는 인간의 인지 속도를 넘어서 세차게 세제액을 뿌려댔다.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켰지만 쉴 수는 없었다. 앞쪽에서는 그릇을 넣고 뒤쪽에서는 세척·건조된 식기를 정리하는 식이었다. 인간 기계였다. 그렇게 하루 11시간을 일하면 몸에서 썩는 냄새가 났다. 퇴근 무렵 옷을 짜면 땀이 흥건하다 못해 검은 국물이 뚝뚝 떨어졌다.
곤욕 중 하나는 내가 청일점이라는 점이었다. 남초(男超) 세상에서 살던 내가 여자들 틈에 끼여 여러 난감한 상황을 마주했다. 몇몇 반목이 심했고, 패거리도 있었다. 계급이나 직급은 없었지만 계급사회였고, 왕초도 있었다. 왕따, 뒷담화와 일러바치기, 거짓말, 왜곡, 무시와 멸시도 은밀하게 이뤄졌다.
특히 나와 한 조를 이룬 파출(派出·파견 나온 인력) 일을 하는 여성은 여럿에게 집중적인 괴롭힘과 따돌림을 당했다. 왜 노동자끼리, 그것도 나약한 사람들끼리 지지고 볶고 싸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감옥을 탈출했더니 지옥으로 굴러 들어간 느낌, 돌멩이를 간신히 피했더니 바위에 부딪친 기분이었다. 하루 11시간 일한 대가는 월 240만 원에 못 미쳤다.
3개월을 거의 다 채웠을 때 나는 퇴행성관절염, 손목터널증후군 등 5개의 지병을 달고 주방을 떠났다.
텃밭 일굴 꿈... 오늘도 현장으로 향한다
칼을 버리고 삽을 든 지금, 막일(노가다)이 힘에 부칠 때면 주방 보조 때를 떠올린다. 그때가 진짜 노가다였다. 그때보다는 지금이 편하고, 맘고생도 덜하다. '반퇴'(퇴직 후 경제적 이유로 다시 경제활동에 뛰어드는 현상)자로 산다는 건 반은 도전이고, 반은 퇴물이 된 것 같다. 아침까지 멀쩡했는데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배가 아파 조퇴한 아이처럼 이유 모를 앓이도 한다.
은퇴를 앞둔 사람이나 이미 은퇴한 사람들 중 상당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한다. 실제로 대다수는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 종돈이라도 있으면 자영업, 돈이 없으면 생계 유지를 위해 재취업에 나서지만 50대의 애매한 나이를 품어줄 자리는 그다지 많지 않다. '에라이~' 소리가 절로 나온다. 일자리는 없고 경쟁자는 모래알만큼이나 많다.
최근 현대자동차의 400명을 뽑는 기술직(생산직) 공개채용에 10만 명 이상이 몰려들었다. 생산직이 이제는 '킹산직'이 된 것이다. 면면을 보면 명문대를 졸업한 대기업 사무직부터 '신의 직장'으로 불린 공기업 직원, 7~9급 공무원까지 총망라됐다. 지난해 기준 현대차 기술직 평균 연봉은 이미 1억 원을 넘었다.
인문계를 나온 나의 지인들도 요즘 이공계 쪽에 발을 들이고 있다. 10여 년 전부터 막일을 시작한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50대에 접어들면서 험지에 들어선다. 그래도 천만다행인 건 막일은 나이 든 사람에게도 진입장벽이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이다. 일반 건설 현장이야 외국인 노동자가 50% 이상 점령했다지만, 이곳 반도체 공장은 내 또래의 사람들도 제법 된다.
내겐 아주 오래된 꿈이 있다. 누구에게나 로망인 '노후에 전원의 삶을 사는 것'이다. 지난해엔 그 꿈의 0.5할을 이뤘다. 집에서 8km 가량 떨어진 곳에 전원주택 부지를 하나 사뒀다. 앞쪽엔 너른 들이 있고 뒤편엔 야트막한 산이 바람을 막아준다. 주변은 산사처럼 고요하고, 회색빛 도시의 어둠조차 밀려들지 않는다. 적당히 단절돼있고 적당히 외롭게 설계돼 있다.
문제는 계약금 10%만 준 상태여서 온전히 내 땅은 아니다. 지난달에 계약금을 완납해야 했는데 기일을 넘기기도 했다. 땅주인에게 겨우겨우 통사정해서 1년여 유보했다.
막일에 투신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이유도 제2의 삶 때문이다. 넉넉하지는 않아도 행복을 소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비를 하고 싶어서다. 가장이기 이전에 중년들도 저녁이 있는 삶을 꿈꾼다.
그러기에 어떤 목적을 갖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먼저 찾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미리미리 제2·제3의 직업을 준비해야 한다. 불시에 들이닥치는 늙은 시간은 하소연을 들어주지 않는다. 유예의 기회도 없다. 시간이 부족했다고 핑계를 댈 수도 없다. 시간이 부족했던 게 아니고, 시간을 잘못 사용했던 거다. 시간에도 반드시 유통기한이 있고 거기에 따른 사용설명서가 있다.
▲ 양중작업을 하는 근로자들이 사용하는 대차의 모습. 4인 1조로 수레를 끌어야한다. |
ⓒ 나재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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