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기왕'으로 보낸 학창시절, 물려주고 싶진 않습니다

박여울 2023. 4. 5.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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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 아이와 함께 책을 읽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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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울 기자]

나는 공부에 열의가 많은 학생이었다. 본격적으로 내신시험을 치는 중학생이 되고나서부터는 성적을 잘 받고 싶은 욕심이 갓 교복을 입은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올라왔다. 유복하지 못한 환경에서 자랐기에 무언가 내 노력으로 번듯한 직장을 얻고야 말겠다는 그 결심이 14살의 나를 공부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첫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집에서 처음으로 교과서를 펼치고 본문을 읽었는데 도무지 내용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때 집에 계셨던 엄마에게 "엄마, 공부가 잘 안 돼. 공부는 어떻게 하는 거야?"라고 질문했던 내 멘트가 여전히 선명하게 기억난다. 어쩌면 그때부터였다. 내 암기 인생의 시작은.

수학을 암기로 푸는 사람이 있다? 

점수는 잘 받고 싶은데 내용은 이해가 안 된다. 그때 내가 나름 터득한 방법은 바로 내용을 달달 외우는 것이었다. 첫 시험을 치고 나니 내 위치를 알 수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더 공부에 대한 열의가 불타올랐다. 더 상위권으로 올라가고 싶은 뚜렷한 목표가 더해진 것이다.

중학교 사회교과서의 지형 단원에는 여러 지형의 종류가 나온다. 아직도 기억나는 게 삼각주와 평야이다. 근데 문제는 이걸 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생각했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직접 본 적이 없는 지형을 사진으로 구분해내야 하고 심지어는 그 뜻도 알아야 한다니. 지금 생각하면 차를 타고, 기차를 타고 가면서 봤던 드넓게 펼쳐진 논을 평야라고 이해하면 되는 건데 그때는 그것조차 연관 짓지 못했다. 

교과내용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나는 또 내 방식대로 외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해 본 분은 아실 거다. 단순 암기는 시간이 매우 많이 걸린다. 전혀 개연성이 없어 보이는 단어들을 인위적으로 연결해서 외우고 또 외워야 하기 때문이다. 아마 보통의 아이라면 이 과정을 거치면서 공부를 점점 포기하게 될 것이다.

이해가 안 된다 → 또 읽어도 모르겠다 → 답답하다 → 공부가 싫다 → 나는 공부를 못 해.

하지만 나는 마지막의 '나는 공부를 못한다'를 '외우면 된다'로 바꾸었다.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는 시간이 남들에 비해 현저히 길어졌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가용할 수 있는 시간 내에 시험공부를 다 못 마치기 때문이다. 잘 외우면 점수가 잘 나오는 과정이 몇 번 반복되다 보니 나는 공부가 곧 암기라는 잘못된 명제를 머릿속에 심었다. 나는 암기를 잘하는 아이라는 착각도 더해졌다. 그렇게 엉덩이 힘으로 공부를 잘하게 된 거라 생각했다.

혹시 수학을 암기해서 푸는 게 가능하다는 걸 아시는지? 이건 고등학교 때 일이다. 시험에 나올 게 뻔한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풀이과정을 수차례 읽어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 풀이과정을 첫 줄부터 마지막줄까지 술술 쓸 수 있을 정도로 외워봤다. 결과는? 100점이었다.

하지만 이런 나도 결국 심각한 문제에 직면했다. 공부하는 그 시간들이 나에게는 고통이 된 것이다. 점수를 확인하는 그 순간은 뿌듯했지만 그건 오래가지 않았다. 이해를 바탕에 깔지 않은 단순암기를 지속할수록 나는 공부에 질려갔다. 그래도 확고한 목표가 있었던 터라 주저 않을 수만은 없었던 나는 하기 싫은 공부를 억척스럽게 해냈다. 그리고 더 이상 학창 시절을 조금도 떠올리고 싶지 않은 어른으로 자랐다.

책을 통해 다시 살게 된 삶 
 
▲ 다가오는 봄을 구경하는 세 아이 그 와중에도 책을 읽는 첫째
ⓒ 박여울
이런 내 학창 시절의 기억이 조금씩 조금씩 흐릿해져 가던 요즘이었다. 지난주에 책장을 살펴보다가 예전에 읽었던 책을 또 읽고픈 마음이 생겨 다시 집어 들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손에서 놓을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일회독 때는 깨닫지 못한 내 학창 시절의 비밀에 대한 답이 고스란히 나와있었기 때문이다.
 
"중등 교과서와 고등 교과서를 정도 이상으로 어려워하는 아이들이 많고, 그 결과 1, 2차 급변동 구간이 만들어집니다. 실제로 중학생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 충격적일 정도로 교과서를 어려워합니다. 전체 중학생 중 최소 70% 이상은 중등 교과서를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공부머리 독서법>, 최승필 저)

나는 암기를 잘하는 게 아니라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한 학생이었다. 그것이 내 출발점이었으니 학창 시절 내내 공부에 어려움을 겪는 건 자명했다. 나는 어릴 때 책을 읽은 기억이 없다. 책이란 곧 재미가 없는 것이었고 왜 읽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존재였다. 책을 읽는 유일한 시기는 바로 독후감 쓰기 대회나 독후감 숙제가 있는 때뿐이었다. 

이런 자발성이 없는 읽기는 일회성으로 끝났고 내 삶에 어떤 영향력도 미치지 못했다. 나는 공부를 힘겹게 해낸 학생이었다. 암울한 청소년기를 보낸 내가 성인이 되고 나서 책을 항상 끼고 사는 다독쟁이 남편을 만나고 그 덕에 육아우울증도 책으로 치유할 수 있었다. 유년시절의 암울한 나는 온데간데 없고 이제는 책의 재미에 푹 빠져있는 30대 중후반이 되었다. 책에서 배운 삶의 태도를 내 인생에 적용하는 과정을 겪다 보니 새로운 삶을 사는 기분이다.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책의 유익함을 이제 와서야 깨닫고 누리고 있다.

내 아이들에게 이런 삶을 일찍부터 알게 하고 싶다.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는 부차적인 문제이다. 시험 100점을 받는 게 내가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이유는 아니다. 그저 나는 이제야 몸에 익혀가고 있는 이 독서의 습관을 아이들에게는 욕심을 부려서라도 자연스레 그 삶에 녹아들게 하고 싶다. 그러면 언젠가는 공부든 관심이 있는 다른 분야든 열정을 가지고 몰입을 할 힘이 생겨나리라 믿는다.

공부는 그저 암기라고 생각하며 고통스럽게 외워왔던 내 삶을 또 살게 하고 싶진 않다. 또한 '나는 이해력이 부족해. 내가 그렇지'라고 체념하며 일찍부터 자신의 삶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아이가 되는 것도 원치 않는다.

나는 책을 통해 시야가 넓어졌고 세상을 보는 안목을 이제야 조금씩 조금씩 기르고 있다. 책 한 권을 통해 한 사람의 생각과 인생을 알게 되고 그로부터 내 삶에 적용할 교훈을 하나하나 메모해 가며 깨닫는 그 즐거운 과정을 우리 아이들과도 함께 하고 싶다. 책을 가까이하고 나서부터는 사람을 만나고 세상을 둘러봐도 모든 이로부터 배울 점이 꼭 한 가지씩은 있다. 책을 읽기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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