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임라이트]사춘기 딸 문 앞에서 자아 성찰하는 싱글맘
능통한 솜씨로 직장인 엄마 불안한 마음 구체화
이상 징후 스산하게 표현, 킬러 활동과 대조
복잡미묘한 표현 백미…애잔한 정서로 귀결
변성현 감독의 '길복순'은 액션을 빙자한 모녀 성장 영화다. 길복순(전도연)은 싱글맘. 능숙한 킬러인데 양육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딸 길재영(김시아)이 중학생이 되고 나서 자신을 거부한다고 느낀다.
"집에 오면 졸졸 따라다니면서 학교에서 있었던 일부터 급식 메뉴까지 쫑알대던 애가 이제 방문 닫고 들어가서 코빼기도 안 비쳐. 뭔 비밀이 그렇게 많은지 핸드폰 비밀번호도 걸어 놓고." "비밀이 생기는 건 슬슬 벽이 생기는 건데." "맞아, 벽! (…) 사람 죽이는 거는 심플해. 애 키우는 거에 비하면."
불안한 모녀 관계에는 개인적이고 환경적인 요소가 내재한다. 길복순은 어린 시절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했다. 딸의 달라지는 모습에서 당시 체감한 불안을 대입하곤 한다. 내면이 혼란해져 사소한 일에도 쉽게 상처받는다. 딸 앞에서 내색하는 법은 없다. 웃음으로 얼버무리거나 눈치를 핼끔핼끔 본다.
전도연은 능통한 솜씨로 직장인 엄마들의 불안한 마음을 구체화한다. 애초 맞춤형으로 설계된 배역이다. 변성현 감독은 "제작 전 대화를 나눠보니 배우 전도연과 엄마 전도연 사이에 간극이 있었다"며 "냉혹한 킬러면서 사춘기 딸을 키우는 싱글맘에 대입시켜 모순적이고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전도연은 이상 징후를 스산하게 표현했다. 흔한 미소에도 뒤숭숭하고 언짢은 감정을 심었다. 간혹 말문이 막히는 장면에선 고개를 푹 숙였다. 과도한 표현이 아니다. 길복순은 안정적인 사랑을 누려본 적이 없다. 아픈 과거를 추스를 새도 없이 살인법을 교육받고 분주하게 임무를 수행했다. 유연한 대처에 서투를 수밖에 없다.
그는 자기 자신을 잘 돌보지도 않는다. 임상 심리학자 헴마 카노바스 사우는 저서 '엄마라는 직업'에서 "엄마가 자기 자신을 존중하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할수록 자녀들과 더 만족한 정서적 유대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엄마는 모든 것을 통제할 수는 없으며 완벽한 이상은 그저 이상일뿐이다."
어수선한 기색은 킬러로 활동할 때와 대조돼 더욱 도드라진다. 전도연은 전혀 다른 얼굴을 보인다. 오다 신이치로(황정민)와 맞붙는 첫 신의 경우 어둠 속의 광녀처럼 그렸다. 치열하게 싸우는 순간에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희열에 차 있는 얼굴에 초점을 맞췄다. 모처럼 모녀 갈등에서 해방돼 세상을 자유롭게 유희하는 것처럼 나타난다.
마냥 희희낙락한 건 아니다. 때때로 딸에게 정체가 발각될 수 있다는 불안이 엄습한다. "죽어가는 사람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칠 때가 있거든? 그런 날은 집에 가서 애랑 눈 마주치기도 겁이 나."
길복순이 딸과 온전하게 소통하지 못하는 결정적 원인이다. 완벽한 모습만 보여주려는 고집이 친밀한 대화를 가로막는다. 아이에게 맞추는 대화는 분명 필요하다. 그러나 일색이 되면 어른들이 불편해한다고 생각해 감정 표현을 숨긴다.
길복순은 애써 외면하고 일방통행할 뿐이다. "나는 엄마가 키우는 화초가 아니야. 그냥 놔둬." "너… 너 쟤들이 그냥 자라는 거 같니? 물 주고 분갈이하고 가지 치고 잡초도 뽑아줘야 해. 그게 내가 하는 일이야." 자녀는 소유물이 아니다. 자기만의 방식을 형성할 자원을 더 필요로 한다. 그 토대 위에서 경험과 가치, 메시지를 엮어가며 성장한다.
전도연은 이 같은 순리를 터득하는 과정에 주안점을 두고 연기했다. 전환점은 길재영이 동성애자임을 밝히는 신이다. 갑작스러운 고백에 딸을 응시하는데 순식간에 온몸이 얼어붙는다. 태연함을 가장하나 흔들리는 눈동자까진 숨기지 못한다. 전도연이 30년 이상 배우로 활동하며 처음 보이는 얼굴이다. 변 감독이 치밀하게 설정한 테두리 안에서 우아하면서도 처절하게 나타낸다.
엄마들은 자녀의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하지만 성에 대해서만큼은 예외다. 걱정과 불안에 휩싸인 채 발만 동동 구르며 모른 척하고 싶어 한다. 마냥 외면하기도 힘들어한다. 사고라도 치면, 성적이 떨어지면, 나중에 엄마를 원망하면 어떡하나 등등 여러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렇다고 대화하자니 너무나 어색하고 막막하다. 안 그래도 대화가 적은데 사이가 더 멀어지는 건 아닌지 머리가 혼란스럽다.
변 감독은 교차하는 진심과 두려움을 현실적 자아 성찰의 계기로 부각한다. "내가 너를 이렇게 몰라도 되니?" "그러는 엄마는? 나한테 솔직해?" 많은 엄마가 빠지는 고민이다. 자기 이야기를 시작으로 이해와 공감을 보이는 데 서투르다. 주야장천 자녀 이야기만 해 감시와 추궁이란 오해를 산다. 엄마에게 실망한 자녀는 엄마도 똑같이 자신에게 실망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둘 사이 대화는 점점 더 힘들어진다.
길복순은 끝까지 딸에게 솔직하지 못하다. 차민규(설경구)의 배려로 정체가 드러나도 마찬가지. 하지만 더는 딸의 눈빛을 피하지 않는다. 성장 경험의 차이를 인정하고 성찰하려는 준비가 돼 있다. 딸의 마음에 가닿아 가시적 변화를 만들어낸다. "엄마, 수고했어. (문) 닫지 마. 답답해."
전도연은 뒤돌아 걷다가 돌아서는 얼굴을 복잡미묘하게 표현했다. 별다른 설정이나 장치 없이 중의적 의미를 담아냈다. 모녀 관계 회복에 대한 기쁨과 차민규에 대한 고마움, 허망스럽게 느껴지는 처지, 번뇌했을 딸에 대한 안쓰러움…. 온갖 감정은 애잔한 정서로 귀결된다.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엄마의 얼굴로.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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