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망대해에서 길어 올린 ‘물·인간·관계’에 대한 탐구
팬데믹으로 시작한 물에 대한 탐구
"남들을 불타오르게 하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남에게 불을 붙이려면 성냥 자체도 파괴되어야 한다! 나는 과감하게 내가 원하는 일을 했다. 앞으로도 나는 내가 원하는 일을 할 것이다."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 딕'에서 에이해브는 흰고래 모비 딕을 죽이려는 집념에 사로잡혀 바다를 헤맨다. 내가 '원하는 일'을 위해 기꺼이 바다로 나가 고래와의 격투를 벌인다. 모두가 주인공 에이해브, 혹은 작품의 화자 이스마일에 주목할 때 작가 바이런 킴은 화자와 에이해브 선장의 배 피쿼드 호에서 우정을 쌓고, 자기 죽음을 위해 준비한 관으로 생명을 살린 아메리카 원주민 출신 작살꾼 퀴퀘그에 집중한다. 순수하고 개방적이며 신실한 그의 모습, 그리고 그가 이끈 바다의 풍경은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피쿼드 호 속 동중정으로 작가의 상상력을 거쳐 초월적 풍경으로 관객에게 찾아온다.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진행 중인 한국계 미국 작가 바이런 킴(62)의 개인전 ‘마린 레이어(Marine Layer)’는 작가의 ‘B.Q.O.’ 연작 11점을 통해 바다 위에서 바라본 하늘과 물속 풍경, 물의 표면 등 작가적 상상력을 통해 구현한 섬세한 물의 색을 선사한다. ‘B.Q.O.’의 이름은 스타니스와프 렘의 ‘솔라리스’, 허먼 멜빌의 ‘모비 딕’, 호머의 ‘오디세우스’에 등장하는 버튼(Berton), 퀴퀘그(Queequeg), 오디세우스(Odysseus)의 앞 글자에서 딴 제목으로, 코로나19 기간 중 미국 플로리다주 캡티바 섬(Captiva Island)에 머물며 작가가 다시 읽은 소설로부터 출발한 소재다. 팬데믹으로 이동이 제한된 사이 외딴 섬에서 바다, 수영, 그리고 소설을 곁에 두고 시간을 보낸 작가의 상상력은 자신이 본 바닷속 깊은 곳, 바다의 표면을 내재화하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마린 레이어’라는 전시 주제를 대변하듯 작가의 작품들은 캔버스 패널 세 개를 나란히 놓는 형태로 전개된다. 맨 아래 캔버스는 물속 풍경, 가운데 캔버스는 물의 표면, 가장 위 캔버스엔 바닷속에서 바라본 하늘을 담았다. 작가는 "내 작업 대부분은 전체에 대한 관계성을 이야기한다"며 "내가 이 세상 사람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우리는 우리보다 더 거대한 전체와 어떻게 연결하는지에 주목했다"고 설명한다. 작가의 시선은 캡티바 섬에서 태평양 연안의 라호야 해변, 뉴욕과 샌디에이고의 실내 수영장, 코네티컷주의 토비 연못 등 다양한 물의 표면과 수면 아래의 풍경을 통해 몰입과 상상, 재해석의 과정을 거쳐 관객에게 다층적으로 가닿는다.
"팬데믹을 계기로 바다와 가까워졌다. 이번 팬데믹은 어떤 면에선 인류가 지구에 소홀해서 발생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작가는 "이번 작품에는 이런 심층적, 이면적 의미를 담았다"고 소개한다. 바다와 싸우고, 경쟁하며 사투를 벌이는 세 명의 소설 속 인물을 통해 인간의 고군분투를 은유하는 대상으로서의 바다에 주목한 그의 작업은 앞으로도 이어질 예정이다. 작가는 22년째 매주 일요일 일기를 그림으로 그리는 ‘선데이 페인팅’ 연작을 선보이고 있다. 다양한 이들의 피부색을 수백 개 작은 패널에 담은 '제유법' 연작도 32년째 지속해온 작가의 꾸준함은 재능을 넘어선 끈기의 위대함을 방증한다.
"시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예일대에는 너무도 뛰어난 시인들이 많아 내가 잘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는 작가의 고백은 그의 진로를 문학에서 미술로 이끈 원인이 타인의 재능에 대한 좌절에 있었음을 시사한다. 하지만 이내 "학부를 마칠 때쯤 현대미술을 접하고 이 분야에서 꾸준히 발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를 통해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았나 싶다"는 말에서는 재능을 이긴 작가의 끈기를 엿볼 수 있다. 결말 없이 이어지는 작가의 작업은 그 어떤 문학작품보다 더 강렬하고 흥미진진한 서사로 관객에게 바다, 그리고 물에 대한 작가의 궁구(窮究)를 예고한다. 전시는 23일까지,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진행된다.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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