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주의 촌철生인] 단어 소유하기

2023. 4. 5. 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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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집행되자마자 열풍을 일으킨 광고가 있었다. 국내에서 광고로 받을 수 있는 온갖 상을 휩쓸었다. 패러디도 쏟아졌다. 알 만한 제품과 기업, 기관에서 대놓고 이 광고를 따라 했다. 한마디로 광고도 매출도 대박을 쳤다. 배우 공효진씨와 공유씨가 남녀모델로 등장한 바로 그 광고. 여자가 묻는다. “영어 좀 하죠?” 여자가 태블릿PC를 내밀며 말한다. “이거 읽어봐요.” 남자,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란 듯 눈썹을 올리며 SSG라고 쓰여 있는 화면을 힐끗 보고는 툭 한마디. “쓱.” 이어지는 여자의 멘트, (무표정하게) “잘하네.”

‘쓱’이라는 한마디로 소비자들을 사로잡은 이 광고는 통합 온라인몰 광고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대기업 영문 이니셜을 따서 SSG닷컴이라고 명명한 것인데, 백화점이나 대형 쇼핑몰과는 달리 이 통합 온라인몰은 인지도가 높지 않았다. 영문 이니셜이라는 게 어떤 이미지도 없고 재미도 없고 감흥도 없기 일쑤. 그러다 보니 정작 쇼핑을 해야 할 때 이 이름을 떠올리기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 고민을 한 방에 해결해 준 광고가 쇼핑몰 론칭 2년이 막 지나가는 시점에 보란 듯 집행된 것이다.

광고는 SSG를 한글 초성 ‘ㅅㅅㄱ’로 각색하고 이것을 다시 한 음절의 단어 ‘쓱’으로 대체함으로써 신생 온라인몰에 비로소 신세계를 열어주었다. 쇼핑이 신속하고 간편하다는 메시지를 단번에 전달했다. 무엇이든 살 수 있다는 메시지도 가능했다. 도시적이면서 고급스럽고 독창적이며 심플한데 위트와 친근함이라는 호감까지 얹어주었으니 몇 년을 가야 할 길을 단번에 건넌 셈이다. 황하의 모래 같은 단어의 바다에서 ‘쓱’이라는 바늘을 찾아낸 광고대행사의 전략과 아이디어, 20세기 미국 화가 에드워드 호퍼 풍을 완벽하게 연출해낸 광고감독의 감각이 기막히게 결합한 덕분이다.

산업화, 세계대전, 대공황 등으로 도시 풍경과 사람들의 내면 풍경이 이전 시대와는 많이 달라진 1920~30년대, 에드워드 호퍼는 자연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도시 공간을 그렸다. 밤에도 환하게 불을 켜고 있는 카페나 약국, 호텔방, 주유소, 극장휴게소 같은 곳. 그림 속 공간들은 사람들의 왕래로 분주하고 소란한 대신 동떨어진 섬처럼 적막하다. 그림 속 주인공은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 외롭고 고독해 보인다. 혼자일 때도 그렇고 누군가 함께 있어도 그렇다. 사선으로 스미는 빛에 의해 빛과 어둠이 나뉜 방 안에 웅크리고 앉아 창밖을 응시하고 있는 여자의 모습은 당시 미국인의 보편적 내면 풍경이었을 것이다. 그 풍경은 SNS를 통해 누군가와 실시간으로 끝없이 소통하면서도 여전히 외로워 죽을 것 같은 21세기 우리의 내면 풍경과도 정확하게 겹친다. 우리를 그 고독한 일상으로부터 구해주는 것이 온라인으로 주문하면 ‘쓱’ 하고 나타나는 택배상자인 것이다!

영화인들도 찬탄해마지 않던 에드워드 호퍼의 개성적 색채와 영화적 구도, 그 도시적 무표정이 한국의 온라인몰 광고에서 멋들어지게 재연됐다는 걸 화가 본인이 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195㎝의 큰 키에 순금처럼 말수가 없고, 40세가 넘은 늦은 나이에 결혼하고서야 이제 상업적 삽화는 그만두어도 된다고 안심하며 자신의 그림을 그리는 데 몰두했던 에드워드 호퍼, 그의 첫 번째 국내 개인전이 4월에 시작된다고 하니, 어쩐지 더 반갑다.

전매특허를 낸 것도 아닌데 ‘쓱’이라는 단어는 이 통합쇼핑몰이 소유한 단어가 돼버렸다. 다른 기업들은 이 단어에 대한 사용권을 빼앗겼다. 마케팅과 광고는 이처럼 어떤 키워드를 선점하느냐의 전쟁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선택하고 집중한 키워드를 통해 광고는 사람들에게 기업이 원하는 메시지와 이미지를 머릿속에 꽂아 넣는다. 키워드는 힘이 세다. 사실이 아니라 인식이 승패를 좌우하는 세상에서 이기려는 자들이 저마다 키워드를 찾아내야 하는 이유다.

카피라이터·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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