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60년을 노래한 디바…‘밤안개’ 속으로 떠나다
‘밤안개’ ‘떠날 때는 말 없이’와 같은 명곡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가수 현미(본명 김명선)씨가 4일 별세했다. 85세.
경찰과 가요계에 따르면 이날 오전 서울 용산구 자택에서 쓰러진 고인을 팬클럽 회장 김모(73)씨가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고인은 곧바로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사망 판정을 받았다.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특유의 재즈풍 목소리와 풍부한 성량, 옆으로 반듯하게 넘긴 머리는 ‘디바 현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덕성여대에서 고전무용을 전공한 고인은 1957년 돈을 벌기 위해 칼춤 무용수로 미8군 공연 무대에 섰다.
우연히 공연 펑크를 낸 한 여가수의 대타로 마이크를 잡은 게 계기가 돼서 김정애·현주씨와 함께 여성 3인조 그룹 ‘현 시스터즈’를 결성했다.
고인은 훗날 남편이 된 작곡가이자 색소폰 연주자 고(故) 이봉조(1931∼87)씨의 눈에 들면서 본격적인 가수의 길을 걸었다. 1962년 이씨와 작업한 1집 수록곡 ‘밤안개’가 전국적 인기를 얻으며 스타가 됐고, 김기덕 감독이 연출한 엄앵란·신성일씨 주연 영화 ‘떠날 때는 말 없이’의 주제곡을 비롯해 ‘보고 싶은 얼굴’ ‘몽땅 내 사랑’ ‘무작정 좋았어요’ 등을 잇달아 히트시키며 60년대를 풍미했다.
고인과 이봉조씨는 승용차가 많지 않던 시절 ‘연예인 마이카(my car)족 1호’로 불리며 전성기를 구가했다고 한다. 고인은 한명숙·패티킴·이미자씨 등과 어깨를 나란히 했고, 손석우·길옥윤씨 등 당대 대표적 작곡가들의 곡을 받았다.
고인은 1971년 이봉조씨가 작곡한 ‘별’로 제4회 그리스 국제가요제 ‘송 오브 올림피아드’에 입상하면서 해외에도 이름을 알렸다. 1981년엔 미국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취임식에 초청돼 축가를 부르기도 했다.
임진모 대중음악 평론가는 “한국 가요에 트로트와 신민요(‘천안삼거리’ 등 민요풍 가요)만 있던 시절, 미8군을 통해 들어온 미국 음악의 정체성을 국내에 소개한 대표적인 메신저이자, 스탠더드 팝의 영역을 확장한 뮤지션”이라고 평했다.
생전에 가수로서의 자부심이 누구보다 강했던 고인은 2007년 데뷔 50주년 기자회견에선 “80세든, 90세든 이가 빠질 때까지 노래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힌 바 있다. 10년 뒤인 2017년 60주년 기념곡 ‘내 걱정은 하지 마’를 발표했다.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K2’를 비롯해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최근까지 후배 가수들은 물론 대중과도 소통했다.
고 이봉조씨는 가수로서 뿐 아니라 인간 현미씨의 인생에도 빼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 미8군 활동 시절부터 3년간 열애를 한 두 사람은 세기의 결혼식을 올렸으나 이씨가 이미 결혼해 자녀까지 둔 상태였다. 두 사람은 1976년까지 부부 관계를 유지하다 결별했다. 이후 두 아들을 고인이 길렀다. 첫째 아들 이영곤씨는 ‘고니’라는 예명으로 가수로 활동했다.
고인은 1938년 평양에서 태어난 실향민 1세대다. 어린 시절 김일성 앞에서 노래를 부를 정도로 유명했던 그는 6·25 전쟁 발발 이듬해 1·4후퇴 때 남한으로 내려왔다. 당시 헤어졌던 두 동생 중 김길자씨를 1998년 48년 만에 중국에서 상봉하기도 했다. 가수 노사연·사봉씨 자매와 배우 한상진씨의 이모다.
고인과 친자매같이 지냈다는 가수 정훈희는 “연예인 ‘끼’를 타고난 가요계 왕언니”라고 연합뉴스에 고인을 회상했다. 가수 혜은이는 “늘 노래를 파워풀하게 부르셔서 후배 가수로서 참 부러웠다”면서 “따뜻한 선배”로 기억했다.
빈소는 서울 동작구 중앙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다.
김선미 기자 call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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