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리더는 필요하다. 당신이 그 리더가 되어도 좋다

이마루 2023. 4. 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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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수미 기자가 '거봐, 내 말 듣기 잘했지?'라고 말하며 웃을 수 있었던 이유.

엄마, 내 말 듣길 잘했지?

엄마가 폐암 수술을 받았다. 당초 의사는 폐결절이 커지는 속도와 모양을 봤을 때 암으로 ‘의심’된다면서, 조직검사를 하기 어려운 위치에 있으니 바로 수술을 해서 정밀검사를 하는 게 좋겠다고 권유했다. 크고 작은 다른 암 수술을 이미 두 차례 받았던 엄마는 필사적으로 도망치려 했다. 처음에는 ‘별다른 증상이 없다’ ‘의심된다는 것뿐 확진이 아닌데 멀쩡한 폐만 잘라낼 수 있지 않겠냐’ 등의 이유를 대다가 나중에는 ‘공기 좋은 시골에 가서 살면 결절이 작아질 수 있다’는 둥, ‘티베트 등 청정 지역을 여행하면서 스트레스 없는 삶을 살면 건강해질 거다’는 둥 고집을 피우기 시작했다. 과거 엄마가 항암약 때문에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를 잘 알고 있는 가족들은 말없이 서로의 눈을 마주치며 난감해할 따름이었다. 사실상 수술을 막무가내로 밀어붙인 건 나다. 상급병원 여러 곳을 예약해 전문의의 소견을 들어보니 한결같이 폐암 수술을 권유했다. 암 가능성에 대해 95%의 확률이라고 숫자를 명시한 의사도 있었다.

수술에 앞서 조직검사를 한다 해도, 하필이면 떼어낸 검체가 암이 아닌 부위에서 나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결과와 상관없이 해당 부위는 절제하는 게 맞다고 했다. 여기까지 들으니 더 이상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비수술적인 방법은 없을까요”를 반복하는 엄마의 말을 끊고, 가능하면 가장 빠른 수술 날짜를 잡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수술을 위해 필요한 추가 검사들을 후다닥 해치웠다. 집으로 향하는 꽉 막힌 올림픽대로 위에서 모녀는 한동안 침묵을 유지했다. 심란한 표정의 엄마가 “그래도…”로 말문을 열자마자 나는 배에 힘을 주고 강형욱 훈련사의 말투를 흉내 냈다. “안 돼.” 태어나서 누구에게도 그렇게까지 단호하고 건조한 명령조의 말투를 써본적은 없었던 것 같다. 다른 가족들이 엄마의 고집을 휘어잡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까지 밀리면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육안으로 봐도 3~4기인 환자들은 수술을 받고 싶어도 받지 못하는데 초기에 발견된 것이 얼마나 다행이며, 미국처럼 의료비가 비싼 나라가 아니어서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수술과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행운이냐, 조카들이 군대 가고 결혼하는 모습까지 건강하게 지켜보시려면 군말 말고 수술받으라며 나는 엄마가 입을 뗄 틈을 주지 않으려고 다다다다 쏘아붙였다.

‘엄마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말하는 건 얼마나 편리하고 안전한가. 엄밀히 따지면 엄마의 몸이고, 엄마의 인생이다. 항암치료를 받아본 적 없는 내가 그것이 얼마나 몸서리쳐지게 아픈 고통인지 가늠하기란 불가능하다. 폐암으로 의심돼 잘라냈는데 사실 암이 아니었던 전례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암 말기 환자가 공기 좋은 곳에서 기적같이 건강을 회복했다는 각종 TV 프로그램의 사례들도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공신력 있는 복수의 전문의가 한결같이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데, 도무지 ‘싫으면 가지 마’라고 무책임하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매정하게 굴었다. 엄마의 말을 끊어 먹고 호통쳤다. “그만 좀 해. 입장을 바꿔서 내가 폐암 의심 진단을 받았는데 수술 안 받겠다고 뻗대봐. 엄마라면 넙죽 ‘그렇게 해라’ 하겠어?”어린 시절 한없이 큰 언덕이자 거대한 나무 그늘이었던 엄마는 어느새 내가 나서서 돌보고 이끌어줘야 하는 대상이 되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밥술도 제대로 못 뜨는 엄마 앞에서 더럭 마음이 약해질 것 같은 순간마다 되새긴 경구는 ‘리더는 비정해야 한다’는 김성근 감독님의 말이었다. 올해 초 감독님을 사석에서 뵐 기회가 있었다. 가시는 팀마다 승리를 안긴 비결을 여쭈었다. 지난해 여름 나는 JTBC 최초의 여성 캡(기동이슈팀장)이 되었고, 10여 명의 팀원들을 이끌면서 ‘좋은 결과를 내야’ 하는 동시에 ‘후배들에게 욕먹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자주 충돌하곤 했다. 그때 감독님의 첫 답변에서 나온 단어가 ‘비정’이었다. “리더는 외로워야 해요. 비정해야 한다고.” 팀원 본인도 모르고 있을 잠재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욕먹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과정과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은 결국 리더가 지는 것이다. 조직을 향한다. 그런 무책임한 사람은 리더의 자격이 없다…. 혼자서 곱씹곤 했던 감독님의 말씀이 엉뚱하게 가족에게 발현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다행히 수술을 잘 마치고 회복 중이다. “거봐, 내 말 듣길 잘했지?” 하루에도 몇 번씩 으스대며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내 앞에 놓인 진짜 ‘좋은 리더’의 시험대는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언젠가 후배들에게 “거봐라, 임마. 내 말 듣길 잘했지?”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심수미

제48회 한국기자상 대상, 제14회 올해의 여기자상을 받은, 언론 최전방에 서 있는 JTBC 기자. 30여 년간 인권의 사각지대를 취재한 수 로이드 로버츠의 〈여자 전쟁〉을 번역했다.심수미 제48회 한국기자상 대상, 제14회 올해의 여기자상을 받은, 언론 최전방에 서 있는 JTBC 기자. 30여 년간 인권의 사각지대를 취재한 수 로이드 로버츠의 〈여자 전쟁〉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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