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하이텍, ‘韓 TSMC’ 첫발 뗐지만…‘물적분할·불통’ 논란 속 행동주의에 덜미
물적분할 논란으로 주주들과 갈등을 빚은 DB하이텍이 우여곡절 끝에 반도체 설계 사업(팹리스)을 자회사로 떼어내고 순수 파운드리(위탁생산) 기업으로 출발하게 됐다. 다만, 주주 반발이 여전히 거세다는 점에서 향후 사업 재편 과정에서 전략적 유연성이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된다.
우여곡절 끝 팹리스 분사
한국의 TSMC 꿈꿔
지난 3월 29일 열린 정기 주주총회에서 DB하이텍은 반도체 설계 사업을 담당하는 브랜드사업부를 분사하는 안건이 가결됐다고 밝혔다. 물적분할로 분사되는 신설 법인 사명은 ‘DB팹리스(가칭)’, 분할 기준일은 5월 2일이다. DB팹리스는 첨단 디스플레이 설계 전문회사로 육성할 계획이다. 회사 측은 “이해 충돌 때문에 범용 제품인 LCD 중심 디스플레이구동칩(DDI)에 국한했던 사업 영역을 고부가가치 OLED 구동칩 등으로 확장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DB하이텍 주력 사업은 반도체 위탁생산을 뜻하는 파운드리 분야다. 이번에 분사가 결정된 사업부는 반도체 설계를 담당하는 브랜드사업부다. DB하이텍이 분사를 추진하는 것에는 나름의 전략적 판단이 깔려 있다.
우선, 반도체 위탁생산과 설계는 단일 조직 아래서는 함께 성장하기 힘든 구조다. 현 조직 구조로는 글로벌 팹리스 업체의 기술 유출 우려를 불식하는 것부터 난제다. 글로벌 팹리스 업체가 반도체 핵심 자산인 설계도를 경쟁 기업인 삼성전자에 맡기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것과 같은 이유다.
반도체 산업 환경도 종합주의 조직보다는 전문주의 조직이 생존에 더욱 유리한 환경으로 변하고 있다. DB하이텍은 종합 반도체(IDM) 회사인 삼성전자와 달리 8인치 웨이퍼 기반 시스템 반도체에 주력하는 전문주의 조직으로 볼 수 있다. 최근에는 반도체가 적용되는 각종 IT 기기의 스펙트럼이 넓어지면서 표준화된 생산능력으로는 특화한 수요에 대응하기 힘들어졌다. DB하이텍 역시 설계 역량이 요구되는 별도 사업부 분할로 조직 체계를 정비함으로써 전방 산업의 맞춤형 수요 대응 역량을 고도화하겠다는 판단이다.
‘강성부펀드’ 지분 매입
지주사 전환 여부 촉각
실제 물적분할 소식이 알려진 직후 DB하이텍 주가가 한동안 하락하면서 DB그룹은 당분간 DB아이엔씨의 지주회사 전환이 미뤄질 전망이다. 자회사인 DB하이텍 주가 하락으로 자산총액이 줄면서 지난해 말 기준으로는 지주회사 요건을 피할 수 있게 됐다. 재계 관계자는 “DB그룹의 가장 큰 우려는 DB아이엔씨의 지주회사 지정에 따른 DB하이텍 추가 지분 확보였다”며 “지주회사 요건 해소에 관한 공정위 판단이 남아 있지만, 해소될 경우 당분간 재무적 부담을 덜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물적분할의 물꼬를 텄지만 지분율 77%에 달하는 소액주주 반발이 여전히 거세다는 점은 DB하이텍의 전략적 유연성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전문가들은 DB하이텍이 물적분할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데 주력했을 뿐, 주주들에게 정당성을 확보할 근본적인 해결책을 내놓지 않아 스텝이 꼬였다고 지적한다. DB하이텍은 ‘물적분할 주주 보호 방안’을 통해 신설 자회사 DB팹리스를 분할 시점부터 5년 이내에 상장할 경우 주주총회 특별결의로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명시했다. 당장 상장을 추진하지 않지만 ‘불가피하게’ 상장할 경우 DB하이텍 주주총회를 통해 주주 동의를 거치도록 한 것이다. 운용업계 관계자는 “분할 과정에서 소액주주와 소통을 더욱 강화하거나 분할 회사의 신주인수권 배정에서 우선순위를 주는 식으로 성장 과실을 주주와 공유하겠다는 인식을 보였어야 했는데, 회사와 최대주주 관점에서 소통을 했다는 인상이 짙다”고 지적했다.
이런 가운데, 행동주의펀드인 KCGI(강성부펀드)가 DB하이텍 지분을 매입한 것으로 나타나 이목을 끈다. 최근 시장에서는 DB하이텍 매수 주체 가운데 사모펀드와 기타법인으로 1000억원이 넘는 규모가 파악되자 설왕설래가 오갔다. 오스템임플란트 공개매수로 차익을 실현한 ‘강성부펀드’가 움직인 것 아니냐는 시각이 적지 않았는데, KCGI 측은 3월 30일 “DB하이텍 지분 7.05%를 취득했다”고 공시했다. KCGI는 “팹리스 분할 등 기업가치 제고에 대한 경영진의 진취적인 의지에 대해 환영한다”면서도 “주주·시장과의 소통 부족으로 소액주주들과 상당한 갈등과 반목이 있었으며, 분할에 대한 의도와 이중상장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받아왔다는 점은 매우 아쉽다”고 평가했다.
DB하이텍은 최근 주목받았던 행동주의펀드의 타깃 기업과 여러모로 겹치는 대목이 많다는 점에서 잦은 입길에 올랐다. 시가총액부터 비슷하다. SM엔터테인먼트, JB금융지주, 한진칼, 오스템임플란트 등 행동주의펀드의 공격 대상이 됐던 기업의 시총은 공교롭게도 2조원 안팎 수준이다. 지분 구조도 행동주의펀드 타깃이 되기 딱 좋다는 게 운용업계 시각이다. 물적분할 말 바꾸기 논란 등으로 최대주주 이미지가 좋지 못한 것도 행동주의펀드의 공세 대상이 되기 쉽다는 분석이다.
주주 행동주의로 DB하이텍 주가가 오르면 DB그룹은 지주사 전환을 피하기 힘들다. 이 경우, DB아이엔씨는 자회사 DB하이텍 지분을 30%로 늘려야 한다. 현재 DB하이텍 시가총액(2조7000억원) 기준으로 5000억원 가까운 자금이 든다. DB아이엔씨의 현 재무구조를 감안할 때 쉽지 않다. 지주회사 전환을 피하려 DB하이텍을 매각하는 것도 고려하기 힘들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지주회사 지정을 회피하려 물적분할을 택한 게 아니냐는 의심스러운 시선이 있는 것이 사실이고, 이게 결국 행동주의펀드 쪽에서 개입의 빌미가 됐을 수 있다”며 “DB그룹 입장에서는 행동주의펀드 득세가 달갑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03호 (2023.04.05~2023.04.11일자) 기사입니다]
Copyright © 매경이코노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