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칼협' 이 말에 담긴 위험한 심리
[송주연 기자]
상담자로 일하면서 나는 종종 '삶에 책임을 지는 문제'를 맞닥뜨린다. 상담실을 찾는 많은 이들이 자신의 삶이 아닌 타인의 삶을 책임지기 위해 애쓰다가 고통을 호소하기 때문이다. 아이 걱정에 스스로의 삶을 잃어버린 부모, 타인의 감정에 책임지느라 자신의 마음을 돌보지 않는 사람들, 때로는 부모를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이들도 만난다. 이 모두는 나름의 사연이 있고, 이 사연들은 종종 나의 마음도 울린다.
하지만 나는 공감과는 별개로 이들이 책임지고 있는 것은 '자신의 삶'이 아니라 '타인의 삶'이라는 걸 분명히 알려주는 편이다. 타인의 삶과 감정은 그들이 스스로 책임질 수 있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사랑이라는 이유로 타인을 책임지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스스로의 삶을 살아갈 때 보다 충만해질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나는 정말로 각자가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기 시작할 때, 관계도 삶도 훨씬 더 풍성해지는 걸 목격하곤 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런 이야기를 나눌 때 내담자들에게 종종 듣게 되는 말이 있다. 바로 '누칼협'이다. 지금 내가 누구의 삶에 책임지고 있는지를 탐색하다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을 간과하고 있음을 깨달은 내담자들은 종종 내게 이렇게 말한다.
"그쵸. 누가 칼들고 협박한 것도 아닌데. 다 제 책임이죠."
나는 이럴 때마다 마음이 복잡해지곤 한다.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겠다'는 의미인 듯 하면서도 자조와 체념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 말이 지금 여기를 살고 있는 우리의 마음을 잘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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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픽사베이 |
나는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한국 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는 생각에 통쾌한 기분이 들기도 했었다. 사회적 안전장치가 부족하고, 연대의 가치가 하락된 세상에서 각자도생만이 살길임을 이보다 더 강렬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리고 나는 당연히도 이 말이 이런 세태를 '비꼬는' 것이기를 바랐다. 그러니까 모든 일을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사회를 역설적으로 풍자하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이 말을 대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내 예상을 빗나갔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에서 사람들은 사회를 비판하기보다는 '그래 내 책임이니 어쩔 수 없지'라는 의미로 이 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내가 속해 있는 몇몇 온라인 커뮤니티의 게시판만 살펴봐도, 취업이 되지 않아도, 아이가 아파도 '칼들고 협박한 것도 아닌데 제 책임이죠'라는 자책과 체념의 글이 늘상 올라와 있다. 하소연 하는 누군가의 사연에 '누가 칼들고 협박했어?'라는 조롱섞인 댓글을 다는 경우도 심심찮게 발견한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이 말을 들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했다. 어차피 도움받을 곳이 없다고 여기고 내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기대를 내려놓게 된다고, 기대하지 않으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다는 의미였다.
'누칼협'에 끌리는 심리 기제
나는 그제서야 왜 이 말이 이토록 유행하는지 고개가 끄덕여졌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탓'을 하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경험하곤 한다. '자기 탓'을 하면 분노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분노는 사람이 경험하는 감정 중 가장 어려운 감정 중 하나다. 화가 난다는 건 무언가 '우리가 상처받고, 권리를 침해당하고 있으며, 욕구와 바람이 적절히 충족되지 못하고 있다'는 메시지이다. 분노를 인지하면 우리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
내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애써야 하고, 침해당한 권리를 되찾아야 하며, 충족되지 못한 욕구와 바람이 무엇인지 찾고, 이를 충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는 정말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쉽게 분노의 원인을 '자기 탓'으로 돌린다. '내 잘못'이라고 생각해버리면, 적절하게 분노를 표현하고 이를 해소하고, 원인을 찾아 바로 잡는데 에너지를 쓰지 않아도 된다. 그저 '내 잘못'이니 내 삶이 망가져도 어쩔 수 없다고 여기고 수동적으로 혹은 우울하게 있으면 그만인 것이다. '누칼협'이 위안이 되는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또한 '누칼협'은 '세상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을 준다. 사람들은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세상이 안전하고 공정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 세상이 안전하고 공정하다고 가정해야 지금까지 내가 해온 노력들이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회에 문제가 있을 때조차 종종 개인의 문제로 그 원인을 돌리곤 한다. '공정한 세상에 대한 믿음'을 지키고자 개인을 희생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도 '누칼협'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모든 것은 '내 탓'이니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괜찮은 곳이라고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떤 일을 '내 탓'으로 여기는 것은 스스로 책임을 지려는 성숙한 태도로 오인하기 쉽다. 그래서 우리는 '누칼협'이라는 말에 쉽게 끌린다.
진정으로 삶을 책임진다는 것
하지만 진정으로 삶을 책임 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나는 삶에 대한 진정한 책임은 '내가 책임져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 내가 어떤 맥락 속에서 살고 있는지, 무엇이 지금 내 삶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조금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지금 나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 진정으로 '내 선택'에 의한 것이고, 바꿀 수 없는 것이라면, 이 선택에 따른 결과를 수용하는 것이 삶을 '책임지는' 태도일 것이다. 하지만 사회의 부조리와 나를 침해하는 타인들로 인해 내 삶의 모양이 바뀌었다면 이에 대해 정당하게 분노하고, 그 분노의 힘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네 선택에 책임을 지라'는 의미로 쓰이는 '누칼협'이 실은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지우는 태도'를 키워준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존재로서 나를 바라보는 것을 막고, 정당하게 책임질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구분하지 못하게 하는 이 말은 실은 책임이 아니라 '회피'와 '체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마음이 회피와 체념으로 기울어질 때 우리는 타인과 손잡을 힘도 잃고 만다. 결국 '누칼협'은 분노를 막고, 변화와 연대의 가능성을 막아버리는 결국엔 나와 세상을 저버리는 말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이 말이 무척 위험하게 느껴진다.
신이시여.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함과,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그리고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라인홀트 니부어(신학자)
'누칼협'은 바꿀 수 있는 용기를 내지 못하게 한다. '누칼협'이 당연한 사회에는 희망이 없다. 모든 것을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삶을 책임지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을 잘 구분하는 것에서 삶에 대한 진정한 책임이 시작됨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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