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는 없고 밑에만 많다... 여성이 돈 덜 받는 또 다른 이유 [소셜 코리아]
한국의 공론장은 다이내믹합니다. 매체도 많고, 의제도 다양하며 논의가 이뤄지는 속도도 빠릅니다. 하지만 많은 논의가 대안 모색 없이 종결됩니다.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는 이런 상황을 바꿔 '대안 담론'을 주류화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근거에 기반한 문제 지적과 분석 ▲문제를 다루는 현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거쳐 ▲실현 가능한 정의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소셜 코리아는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이 상생과 연대의 담론을 확산하고자 학계, 시민사회, 노동계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열린 플랫폼입니다. 기사에 대한 의견 또는 기고 제안은 social.corea@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기자말>
[권혜원 ]
지난 겨울 넷플릭스 TV쇼 부문에서 가장 인기를 끈 프로그램은 최강 피지컬 100인이 벌이는 서바이벌 게임 <피지컬: 100>이었다. 출연자 한 명 한 명이 고된 훈련을 통과하며 흘려 온 땀과 눈물, 투지의 역사를 증언하는 신체의 경합은 가히 주목받을 만한 에너지를 뿜어냈다. 필자도 스크린 속 피지컬 강자들의 대결을 숨죽여 지켜보면서 감탄을 연발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것은 아쉬움과 유감이 섞인 비판의 시선으로 바뀌어 갔다. 근력, 순발력, 지구력, 유연성 등의 체력을 종합적으로 평가하기 위해 다양한 내용의 경기로 경합의 장을 마련했다고는 하지만 뒤로 갈수록 여성들이 대거 탈락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대1 데스매치에서의 여성 대 남성의 대결 조 그리고 최종 20명의 생존자를 가르는 2톤 무게의 배 끌기 미션 등이 그것이다.
겉으로는 나이, 체급, 성별을 구분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동등한 규칙을 적용한다고 했지만, 그러한 게임 룰 자체가 근력이 강한 남성 참가자들에게 더 유리한 구조였다. 여성이 다수였던 팀은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제작진이 '불가능의 가능성'을 보았다며 아낌없는 격려의 메시지를 띄웠지만, 이들은 2톤 무게의 장벽을 뚫지 못하고 다음 라운드 진출에 실패했다.
형식적으로는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기회를 부여받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상 보이지 않는 유리 천장이 여성들의 지위 상승을 막고 '그들만의 리그' 밖으로 밀어내는 것 같아서 경합을 지켜보는 마음이 불편해졌다. 이 프로그램을 보며 나는 기계적 평등의 관점에서 직무 가치와 성과를 평가하는 것이 공정하다고 여기는 세간의 착각이 떠올랐다.
스포츠계의 예를 좀 더 들어보자. 12개의 그랜드슬램 단식 타이틀을 비롯하여 총 39번의 그랜드슬램 우승을 기록한 테니스 선수 빌리 진 킹은 1973년 US오픈에서 여성 선수에게도 남성과 동일한 액수의 상금을 지급하지 않으면 대회에 출전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남성 우승자 상금이 여성 우승자 상금보다 8배나 많은 현실에 맞선 것이다.
이와 같은 킹 선수의 항의와 그 뒤를 이은 여성 선수들의 지속적 문제 제기 덕분에 4개 테니스 메이저 대회 성별 상금 격차는 끝내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킹 선수가 '동일노동 동일임금'(equal pay for equal work)을 외친 시점에 협회 관계자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은 동일 임금의 논리를 거부하거나 조롱했다.
그들은 그랜드슬램 경기에서 남성은 최대 5세트까지 경기를 하지만 여성은 최대 3세트까지만 뛰면 된다는 점 그리고 남자 단식 경기 관객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을 내세우며 남성이 시합 내내 쏟는 노동의 난이도와 강도가 더 높고 더 우월한 시장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했다.
▲ 넷플릭스 오리지널 <피지컬: 100> 포스터 |
ⓒ Netflix |
성별 상금 차이를 순차적으로 없앤 메이저대회의 결정은 이를 정면에서 반박한다. 이러한 결정은 여성과 남성의 체력과 피지컬의 차이가 차별로 귀결되어서는 안 되며 경기에 투여하는 여성과 남성의 노력과 퍼포먼스의 가치를 평면적으로 비교해서도 안 된다고 본다.
비교가능한 가치(comparable worth)의 관점에서 보면 시합에서 여성 선수들의 '직무 가치'는 남성 선수의 것과 동등하기에 동일 수준의 보수를 지급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대회 주최 측은 남녀 선수들의 체력 차이를 테니스 기량 우열의 징표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봤다. 1라운드부터 결승에 이르는 전 여정에서 여성 선수들이 투여하는 노력과 그들이 발휘하는 기량은 남성 선수들의 것과 동일한 가치를 갖는 것으로 평가한 것이다.
만약 여기에 <피지컬: 100>의 룰을 적용한다면 여성 선수들은 다음 단계 진출 과정에서 매번 유리천장에 부딪혀 상금과 랭킹에서 모두 주변화되고 배제될 것이다. 성별 차이를 무시하고 누구에게나 똑같은 룰을 적용함으로써 오히려 차별적 결과가 발생해 여성이 낮은 소득과 하위 랭킹으로 고착된다면 그것은 과연 공정한가?
불행하게도 우리의 경우 미디어, 스포츠계뿐 아니라 일터 전반에서 유리천장과 장벽이 견고하다. 지난해 12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공개한 2021년 기준 성별 임금 격차 조사에서 한국은 26년째 성별 임금 격차 1위의 불명예를 차지하였다. 한국의 시간당 성별 임금 격차는 31.1%로 조사 대상 39개국 중 최대였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2013년부터 매년 발표하는 유리천장 지수에서도 한국은 11년 연속 최하위를 기록했다. 성별 소득격차, 여성의 노동참여율, 고위직 여성 비율, 성별 육아휴직 현황 등 세부 지표를 종합해 산정한다. 실제 수치를 보면 한국은 기업 임원 중 여성 비율이 12.8%로 OECD 평균 30.1%의 절반에도 못 미쳤고, 의회 내 여성 비율 또한 18.6%로 OECD 평균 33.8%와 큰 차이를 보였다.
왜 우리나라 성평등 지수는 최하위권에서 맴돌고 있는 걸까. 2006년 도입한 적극적 고용개선조치(AA: Affirmative action) 제도에 따라 기업이 제출한 자료를 보면 그 원인을 추정할 수 있다. AA제도에 따라 공공기관, 지방공사와 상시근로자 500인 이상, 상시근로자 300인 이상의 공시대상 기업집단은 매년 직종별·직급별 남녀 근로자 수와 임금 등의 자료를 고용노동부에 제출해야 한다.
<시사인>은 지난해 10월 24일 이 자료를 분석해 보도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여성 임원이 단 1명도 없는 기업이 100개 중 33개이고 나머지도 대부분 10% 미만이다. 반면 여성 고용 비율은 직급이 낮을수록 높아진다. 기업이 자체 분석해 제출한 자료에서도 가장 자주 반복되는 문장은 '남녀 간 직급 및 직종별 분포 차이가 크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기업 내 여성의 고위직 비율이 낮은 것이 성별 임금 격차의 원인 중 하나인 것이다.
이 기사가 밝힌 성별 격차의 다른 중요한 요인은 성별 직종 분리이다. 상대적으로 높은 급여를 받는 직종은 남성 근무자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임금이 낮은 직종은 여성 집중성이 강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다수의 기업이 이를 제도적 차별의 결과로 보지 않고 있어서 적극적 개선의 필요성을 못 느낀다는 것이다. AA제도의 취지는 과거의 누적적 차별의 결과로 빚어진 현재의 불평등과 격차를 확인하고 그 원인을 분석하여 개선책을 마련하는 것이며, 이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특정 성을 우대하는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여성과 소수자를 남성과 동등하게 대우하는 것만으로는 누적적 차별의 결과로 발생한 구조화된 불평등을 시정할 수 없기에 적극적 우대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 여성과 소수자를 남성과 동등하게 대우하는 것만으로는 누적적 차별의 결과로 발생한 구조화된 불평등을 시정할 수 없다. |
ⓒ 셔터스톡 |
이를 위해서는 채용 과정에서 성별 다양성을 확대하는 것뿐 아니라 여성 관리자 비율, 여성 임원 비율을 높이기 위해 어떠한 특별한 조치가 필요한지, 현재의 업무 배치에서 성 차별적 편견에 의한 배제가 일어나고 있지는 않은지, 성과평가와 승진 기준 등이 남성 표준에 맞춰져서 여성이 고임금 남성 지배적 직종으로 진출하거나 승진 또는 경력 개발을 할 기회를 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 체계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또한 직무 특성상 남성에게만 적합한 것이라고 여겨져온 양질의 일자리에 대한 여성의 접근 기회를 높이고, 그 직무 자체를 여성 친화적으로 만들어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성별 직종 분리를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여기는 것은 결국 성별 스테레오타입에 의한 구조적 성차별의 강화로 귀결될 뿐이다.
UN 등 국제기구가 지속가능한 발전의 핵심 목표 중 하나로 성평등 증진을 내세웠으며, 이를 위해 성 주류화 관점을 채택할 것을 권고했다는 점을 우리는 환기할 필요가 있다. 성 주류화 관점은 정부와 기업이 모든 정책 결정과 실행 및 평가의 각 수준에서 성차별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여 결과의 불평등을 감소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함을 뜻한다.
정부는 AA제도의 실효성을 강화해야 하며 해외 주요국들이 성별 임금 격차 해소를 위해 도입한 동일노동 동일임금 인증제나 임금공개법 등에 주목하여 우리 실정에 맞는 법제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기업은 ESG 경영의 사회(S) 부문에서 임금 격차, 젠더 다양성 지표가 핵심적 위치를 차지한다는 점에 주목하여 성평등한 일터를 만드는 것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미 세계거래소, 세계경제포럼, EU 등 다양한 글로벌 기구와 단체는 비재무 정보 공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면서 성별 다양성, 성별 임금 비율 등을 상세히 공개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 권혜원 / 동덕여대 경영학과 교수(소셜 코리아 운영위원) |
ⓒ 권혜원 |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권혜원 동덕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소셜 코리아>의 운영위원을 맡고 있습니다. 관심 영역은 노동시장 이중화 해소, 노동권과 성평등의 의제를 통합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입니다. 학계에서는 한국산업노동학회 부회장, 한국고용노사관계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서울시와 성남시 생활임금위원장,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을 역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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