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Q sign #10] 노란 발톱, 까만 발톱
“앗 뜨거워라!” 손을 금방 떼기는 하였지만, 오징어나 쥐포처럼 구워진 것은 아니라도 손바닥이 손에서 벙~떠버린 느낌. 마침, 냉면 국수를 찰지게 하려는 얼음물에 손을 집어넣었다. 왼손바닥으로 얼음들을 만지작거리면서 계속 기도를 드렸다. 내내 그렇게 하는 가운데 손바닥은 자기 소속인 손으로 안착하였고 더 이상의 화끈거림도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지금도 왼쪽 손바닥을 볼 때면 그때의 기억이 새롭다.
어렸을 때는 사람들이 다 같은 줄 알았다. 워낙에 부지런하고 책임감이 크셨던 아버지. 세상의 모든 남자가 모두 아버지와 같은 줄로 알았는데 결혼해서 살면서, 가끔은 그런 아버지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어째서 자식들에게 세상을 그렇게 하나도 가르쳐주지 않으신 것일까? 부자도 아니면서 이 사람 저 사람 다 거두고 도와주신 것까지는 그렇다 해도 어떻게 돈에 대해서 그렇게 무방비로 자식들을 키운 것일까.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는 먹고사는 것이 어디선가 저절로 나오는 줄로만 알았다. 내 아버지는 일곱이나 되는 자식들을 한 번도 굶기거나 헐벗게 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결혼하고 난 후 시모에게서 가장 먼저 들은 말은, “다른 집 며느리는 회사를 차려오고 집을 해서 왔다. 원래 인물 좋은 남편은 아내가 평생 벌어먹여 살리는 것이다”였다.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를 몰랐다. 너무나도 맹탕인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던 고로. 직장생활도 거의 하지 않던 나, 잠깐 일을 했을 때도 월급을 받으면 그 날로 온 가족들의 선물을 사 가지고(일 하는 사람까지) 들어갔다. 이틀 후엔 아버지에게 교통비를 달라고 하면서. 너무 한심한 나의 모습이었다.
무슨 특별한 재주가 없는 아기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얼떨결에 책 세일즈도 하고 보험 세일즈를 하다가(한 건도 성사시키지 못했다.) 야쿠르트 아줌마를 하게 되었다. 요새는 바퀴가 달린 카트가 있지만 1974년쯤에는 무거운 가방을 어깨에 메고 이 집 저 집을 다니며 배달을 했다. 하루는 언덕길을 올라서 걸어가는데 마주 오던 아저씨가 내게 물었다. “남편은 뭐 해요?” “집에 있어요.” 지금 생각하면 못 들은 척하고 지나쳐도 될 일이었지만 그때는 자동 반사적으로 대답을 했다. 착한 아이처럼.
그 아저씨가 “미친 놈” 하면서 지나갔다. 기실, 미치고 안 미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정작 문제가 된 것은 걷고 또 걸어 다니느라 노랗게 곪아버린 내 발가락 들이었다.
그리고 2011년도 여름, 발톱들이 다시 한번 그 존재감을 드러내게 되었다. 식당의 주방 보조로 하루에 열 시간을 서서 넘어지고 자빠지고 데고 베이고 하는 와중에, 운동화 속에서 고생하던 내 발톱들이 새까맣게 되었다. 피가 발끝으로 몰려 터져 발톱 밑에서 굳으니 그렇게 된 것이었다. 뭐 그래도 감사한 것은, 발톱은 빠져도 다시 나오고 자란다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이제 내 발톱들은 멀쩡하다. 모든 일은 시간이 데리고 사라진다. 고통 없는 인생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 경험들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처지와 형편을 알게 되었고, 먹고 사는 일이 얼마나 엄숙한 일인지를 알게 되었다.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든 일단 일을 하는 사람들을 존경하게 되었다. 기생충같이 사는 사람이 아닌 이상.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책임을 지는 모든 사람은 위대하다.
아주 옛날에 용산 시장에 간 적이 있는데, 고무바닥(?)을 배에 대고 기어 다니면서 실과 바늘들을 파시던 그 장애인 아저씨도 대단히 존경스러워 보였다. 무슨 일이든 일을 하는 사람은 위대하다. 나쁜 일이 아닌 이상.
식물들은 평생 잎이 지고 다시 피면서 살아가지만 동물과 인간들은 오직 한 벌의 몸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래서 어느 때는 눈을, 입을, 손을, 다리를 다치고 회복하고, 못하기도 하면서 일생을 살아간다. 내 엄마는 40대 초반에 중풍으로 쓰러져서 10년을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다. 나는 어느새 내 엄마보다 20년 이상을 더 살고 있다. 더 살고 싶다거나 그래야 될 이유나 목적이 특별히 있어서가 아니라 내 창조주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니 사는 것이다. 누구라도, 자기 뜻대로 더 살거나 덜 살 수가 없다. 이것은 그 자체가 은혜이고 축복이며 순종이다.
어느 도시에 가든지 먼저 해야 할 일들이 몇 가지가 있다. 먼저 처소를 구하고 주소 이전을 한 후에는 Drive License를 새 주소로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그 도시의 도서관을 찾아가서 도서관 카드를 만들어야 한다. 도서관에는 아쉬울 때 도움이 되는 자료들과 친절한 직원들이 상시 대기 중이다. 그 일들은 Colorado에 도착해서도 다를 바 없었다. 나는 가장 인접한 Library로 갔다. 거기서 Tech. Collage인 EGTC 커리큘럼을 만나게 되었다. 명시된 학교 주소지를 찾아 당시에 살던 아파트 앞에서 버스를 타고 Down Town으로 나갔다. 종점에 내려서 행인들에게 물어 물어서 드디어 학교를 찾아 들어갔다. 나는 묻는 것에는 열심이다. 내가 알 수 없는 것들, 확실하지 않은 사항에 대해서는 묻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 그들은 나의 유용한 선생님이라고 생각한다. 인상이 좀 험하다 해도 자기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에게 나쁘게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다시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이태리계 혹은 프랑스계 유대인의 Fashion Company에서 Pattern Maker로 일을 하다가 부득불 신학을 하게 되었고, 교회에서 방송국에서 일하다 보니 Fashion 감각도 당연히 떨어졌고 현재 돌아가는 Trend도 파악을 해야 되었기 때문이다. 신학교를 들어갈 무렵, 나의 시간당 임금은 $15.00이었다. 1987년 그 당시의 기본임금은 $3.50이었고. 그 뿐만이 아니었다. 다니던 회사에서는 나에게 Dental을 포함한 모든 보험, 그것도 New York Life의 보험까지도 들어주었다. 그렇게도 재미있었던 일. 그 일을 다시 시작하게 된다면, 일주일에 3일 정도만 일해도 나머지 시간은 자비량으로 복음을 증거할 수가 있게 될 터.
사실, 하던 사역을 내려놓고 두 살 된 손자와 백일 된 손녀를 8년간 키우다가 아이들을 떠나고 나니, 그 아이들이 그렇게 보고 싶을 수가 없었다. 어디를 가도, 무엇을 보아도 아이들의 모습이 겹쳐서, “할머니,~~~”라고 부르는 그 음성들이 들리는 것 같아서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그때 알았다, 그리움도 고통이라는 것을. 그럼 그대로 그 아이들과 살지 왜 떠났느냐고 누군가가 내게 묻는다면, “떠나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고 더 머물고 싶지가 않았다고 대답을 하겠다.
버스 종점에 내려서도 이리로 저리로 걸어서 학교를 발견하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간단한 테스트를 통과한 후, 등록하려고 학비를 담당하는 직원 앞에 앉았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동서남북을 알지 못하는 낯선 도시에서의 새 출발이었다. <계속>
◇김승인 목사는 1947년에 태어나 서울 한성여고를 졸업하고 1982년 미국 이민 생활을 시작했다. LA 기술전문대학, Emily Griffith 기술전문대학을 나와 패션 샘플 디자인 등을 했다. 미국 베데스다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북미총회에서 안수받았다. 나성순복음교회에서 행정 비서를 했다. 신앙에세이를 통해 문서선교, 캘리포니아에 있는 복음방송국(KGBC)에서 방송 사역을 했다. 미주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 논픽션 다큐멘터리 부문 수상했다.
정리=
전병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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