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곡관리법 결국 대통령 거부권 행사, 75년째 ‘쌀 매입 수난사’
남아도는 쌀을 정부가 의무적으로 사들이는 내용의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사실상 폐기 수순을 밟는다. 윤석열 대통령이 4일 국무회의에서 재의 요구(거부권 행사)를 하기로 결정하면서다.
윤 대통령이 거부권 행사란 초강수를 꺼내 든 건 양곡관리법을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막대한 재정 때문이다. 논란이 된 법안은 쌀 초과 생산량이 전체 생산량의 3~5%를 웃돌거나, 수확기 쌀 가격이 평년보다 5~8% 넘게 내려가면 남아도는 쌀을 정부가 의무적으로 사들이는 내용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양곡관리법이 그대로 시행되면 농가 스스로 구조조정에 나설 유인이 줄면서 오는 2030년 쌀 초과 생산량이 64만1000t에 이르겠다고 추산했다. 쌀 매입에만 연 1조원 넘는 예산을 투입해야 하는 규모다. 정황근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지금도 남는 쌀을 더 많이 남게 만들고, 이를 사는 데 들어가는 국민 혈세는 매년 증가해 2030년 1조4000억원대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도 오히려 쌀값은 떨어지고 쌀 재배농가 소득도 감소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여기에 1990년대 말 100㎏ 안팎에 달했던 쌀 소비량은 지난해 54.4㎏으로 반 토막이 났다. 농촌경제연구원은 2030년 쌀 소비량이 47.1㎏으로 내려앉으면서 매년 20만t 안팎의 쌀이 남아돌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재배 면적 감축, 작물 전환 등 농가 변화 속도는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남는 쌀을 의무적으로 매입해주면 농가 스스로 쌀 재배량을 감축할 유인이 줄어든다.
정 장관은 “이미 충분한 양을 정부가 비축하고 있고 남아서 문제다. 농업인이 계속 쌀 생산에 머무르게 하여 정작 수입에 의존하는 밀과 콩 등 주요 식량 작물의 국내 생산을 늘리기 어렵다”고 했다.
정 장관은 거부권 행사 후속 조치로 “6일 민ㆍ당ㆍ정 협의회를 개최해 관련 대책을 마련한 후 발표할 계획”이라고 했지만, 농민단체가 반발하는 등 후폭풍은 여전하다.
사실 쌀 지원 정책을 둘러싼 정치권과 정부, 농가 사이 공방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정부 수립 이후 75년 동안 반복된 일이다. 1948년 정부 수립과 동시에 쌀을 매입ㆍ비축하는 추곡수매제가 실시됐다. 1950년 양곡관리법 제정과 함께 쌀 수매가격을 국회에서 동의해야 확정할 수 있는 국회동의제도 도입됐다. 주식인 쌀이 민생과 농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막대했기 때문이다. 다만 당시에는 쌀 생산량이 부족해 값이 오르면 서민 생활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게 더 걱정이었다.
당시에도 재정 부담은 컸다. 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쌀과 보리 가격 안정용으로 쓰이던 양곡관리특별회계 누적 적자가 1980년대 중반 1조6000억원에 육박할 정도였다. 연간 정부 예산이 11조~12조원 수준이던 시절이다.
1993년 ‘우루과이 라운드’ 타결에 따른 무역 시장 개방 수순으로 2004년 쌀 추곡수매제는 폐지됐다. 그 과정에서 정치권과 농가 반발이 극렬했고 정부는 대안으로 공공비축ㆍ쌀소득보전직불제를 도입했다. 이를 통해 비축 명목으로 쌀값을 간접적으로 조정하는 시장격리제도가 지금까지 유지됐다.
김한호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는 “식량 자급은 미국ㆍ일본 등 다른 선진국에서도 단기간에 해결하지 못한 난제인 만큼 (쌀 의무매입 같은) 손쉬운 방법만 논의하기보다는 정치권과 정부가 다시 근본적 해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라고 제언했다.
세종=조현숙 기자 newea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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