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외이사 열전]①촉망받는 관료서 단골 사외이사로...이윤재 신한금융지주 이사회 의장
편집자주 -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사외이사제도가 도입됐다. 20여년이 지났는데도 경영진의 독단적인 판단을 견제하고, 소액주주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취지가 제대로 달성되고 있는지 의문이다. 사외이사제도가 제대로 정착되긴 멀었다는 평가가 많다. 주요 금융사와 기업들의 최고경영자(CEO)가 누군지는 알아도, 사외이사로 어떤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는지는 잘 모른다. 아시아경제는 주요 금융사와 기업들의 사외이사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이며, 어떻게 활동했는지 등을 소개하는 [사외이사 열전] 시리즈를 시작한다.
“술자리요? (웃음) 사석에서 농담도 잘 못하시는 분입니다. 굉장히 치밀하고, 어떤 사안이든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는 분이에요. 그 연세에도 지금까지 공부에 매진하는 분이기도 하고요. 어찌보면 사외이사라는, 경영진을 감시·감독할 중요한 역할을 맡는 데 적격인 분이에요."
이윤재(73) 전 대통령비서실 재정경제비서관이 지난 23일 정기 주주총회에서 신한금융지주 이사회를 주재할 의장으로 공식 선임됐다. 이 의장은 일찌감치 장관감으로 불리던 촉망받는 공무원 자리를 내던진 후 경영인, 칼럼니스트, 번역가, 사외이사 등으로 종횡무진한 독특한 이력을 가진 인사다.
'미래의 장관감' 승승장구 정통관료
1950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 의장은 경기고, 서울대 법과대학을 거쳐 행정고시를 패스한 '정통 관료' 출신이다. 당대의 엘리트 코스인 'KS라인(경기고-서울대)'을 거쳤다. 이른바 ‘모피아(Mopia·옛 재정경제원 출신 관료집단을 일컫는 말)의 대부’로 불리는 이헌재(79) 전 경제부총리의 사촌동생이자 직통 후배이기도 하다.
이 의장은 대학을 졸업하기 전인 1972년 행정고시 11회에 합격, 경제기획원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빈틈없는 일처리와 성실함으로 당시 과장이던 진념 전 경제부총리, 강봉균 전 재정경제부 장관, 국장이던 고 김재익 경제수석비서관 등으로부터 인정받으며 일찌감치 ‘재목(材木)’으로 꼽힌 것으로 전해진다.
과장으로 승진한 이 의장은 1980년엔 미국 스탠퍼드대에 유학해 경영학석사(MBA) 학위를 취득했다. 귀국 후엔 자금계획과장, 건설교통예산담당관, 예산총괄과장, 대외조정실 제2협력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비서실장, 재정경제원 은행보험심의관, 경제정책국장 등 승진 가도를 달렸다. 동기 중에서도 언제나 승진 속도가 ‘톱’이었다고 전한다.
화려한 이력만큼이나 내부 신망도 두터웠다. 그는 '이코노미스트'가 지난 2007년 당시 정부 부처 과장 77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가장 영향을 많이 받았거나 인상적인 선배 공직자’ 투표에서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한덕수 국무총리, 이규성 전 재정경제부 장관 등 내로라 하는 선배들과 함께 3표를 얻어 공동 1위에 오르기도 했다.
공직시절 그는 후배들이 올린 보고서를 마지막 장까지 꼼꼼이 읽고 언제나 수정방향도 구체적으로 내려 ‘배울점이 많은 상사’로 꼽혔다는 전언이다. 그는 사석에서도 "상사의 역할은 부하들의 역량을 배양하는 것이다. 언제나 구체적으로 방향을 제시해 그의 능력을 배양해 줘야 한다"고 자주 말했다고 한다.
다만 사촌형 이 전 부총리가 두주불사(斗酒不辭)로 뛰어한 친화력을 통해 자신의 계보를 구축한 것과 달리, 그는 공직생활 시절 대인관계에 있어 다소 건조하단 평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술자리보단 연구에 집중하는 학자형인데다, 보신(保身) 성향이 뚜렷한 공직사회에선 눈에 띄게 개혁·개방적인 성향이 강했다고 한다.
재정경제부 시절 가까운 거리에서 그를 지켜본 한 금융권 고위관계자는 "이 의장은 보통의 공무원 올드보이(OB)완 다르다. 한데 모여 술 한잔 기울이며 흘러간 옛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아니다"라면서 "공직시절에도 술 마시러 다니기보단 오로지 공부, 연구에만 몰두하는 사람이었다. '술 먹을 시간이 있으면 영어 공부라도 해라'고 한 말이 기억난다"고 했다.
돌연 야인으로…칼럼니스트, 번역가, 사외이사
이 의장은 김대중 정부에서도 대통령비서실 정책기획수석비서관실 정책1비서관으로 발탁됐고, 같은 해엔 경제수석실 재정경제비서관(1급)까지 올랐다. 미래의 장관감이라는 표현은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쉰이 되기 직전인 1999년 돌연 공직에서 떠나 야인(野人)을 자청해 관가에 충격을 던졌다. 당시 정권으로부터 경제부처 차관자리나 요직 중의 요직으로 불리는 예산실장 자리 등을 제의받기도 했지만 미련없이 명예퇴직을 신청했다고 한다.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그는 갑작스런 명예퇴직 신청과 관련해 "외환위기 당시 정책 담당자로서 언젠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직업관료로서 하고 싶은 일은 다 해봤다고 생각한다”,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사회과학이 아닌 인문과학을 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명퇴 이후 김앤장 법률사무소 고문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2001년엔 사촌형 이 전 부총리와 민간 경제 싱크탱크인 코레이(KoREI)를 창립, 대표직을 맡아 약 10년간 활동했다. 이 의장은 2004년엔 이 전 부총리가 우리은행 인수 등을 목표로 만든 사모펀드(PEF)인 '이헌재 펀드'의 실무 작업을 총괄하기도 했다.
공직을 떠난 이후로도 이 의장은 여러 차례 입각 1순위에 꼽힌 인물이었다. 특히 참여정부 초반엔 조각, 개각 때마다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금융감독위원장 등 요직 하마평에 오르기도 했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오래전 일이지만 관료 사회에서 '천재'로 불리는 인물이었다고 한다"고 전했다.
하지만 그는 여러차례 '변신'도 시도한다. 그는 2000년대 후반엔 한 일간지에 칼럼니스트로 나서 경제 뿐만 이 아닌 다양한 사회현상에 대한 통찰을 드러냈다. 이 과정에서도 특유의 개혁·개방 지향이 드러났다는 평가다. 그는 당시 기고를 통해 “치열한 경쟁 상황에서 보수가 개인의 능력과 성과를 제대로 반영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문제는 ‘제대로’ 여부를 누가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하는 데 있다”면서 “또 그 제대로가 경영진에게만 국한돼선 안되고, 한 기업의 생성 발전과 성과 실현에 참여한 모두의 노력과 기여에 제대로 적용돼야 한다”고 말했다. 반기업정서에 대해서도 “우리나 그들(선진국)이나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은 기업의 잘못된 행위이지 기업 그 자체가 아니다”고 했다.
그를 가까이서 본 한 금융권 관계자는 "상당한 통찰력과 사고력을 겸비함과 동시에 매우 개혁·개방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분"이라면서 "폐쇄경제 보단 대내외 경쟁을 통한 경쟁력 제고, 변화에 대한 능동적 대응 등을 공직사회에서도 강조했고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라고 평했다.
이 의장은 번역가의 길에도 도전했다. 영어에 조예가 깊은 그는 2013년 레일라 아부렐라의 ‘번역사’, 2016년엔 토마스 하디의 ‘캐스터브리지의 시장’ 2권을 번역해 출간하기도 했다. 이 의장은 평소 국내 영문학 번역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50~1960년대 일본 작가들이 번역한 책을 중역했던 경우가 많아 질적인 문제가 많다는 판단에서다. 이 의장이 특히 번역에 공을 들였던 작품은 ‘캐스터브리지의 시장’이다. 저작권 보호기간(70년)이 끝나자 번역작업에 착수했는데, 이 의장은 특유의 학구적 기질을 발휘해 고증에 고증을 거듭했다는 것이 주변 인사들의 전언이다.
단골 사외이사
이 의장이 공직에서 물러난 후 주로 활동한 무대는 기업이었다. 그는 퇴임후 제일은행, 삼성화재, 조흥은행, 에쓰오일(S-OIL), KT&G, LG, CJ프레시웨이, 신한금융지주 등 굵직한 국내 기업에서 사외이사 역할을 수행했다. 신한금융 이사회엔 지난 2019년 IMM인베스트먼트의 추천으로 합류했다. 이사회 멤버 중에선 변양호 전 사외이사와 함께 ‘투 톱’으로 회의 때마다 의견 제시에 적극적이고, 때때로 회사 상황에 쓴소리도 아끼지 않는 사외이사로 꼽혔다는 게 안팎의 평가다.
이 의장과 사외이사로 활동한 한 인사는 "1년여간 함께 이사회에서 마주하면서 공무원 출신의, 굉장히 깐깐한 스타일이란 인상을 받았다.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건 스스로 공부를 많이 한다는 것이었다. 의문이 생기면 스스로 문제를 찾아 연구하더라"라면서 "이전에 펀드회사(이헌재 펀드)도 운영한 바 있어서 사업 전반에 대한 이해가 높아 보였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그는 또 "변양호 전 이사가 자진 사퇴하면서 이 의장이 의결권 자문사의 선임 반대 권고를 감내해야 하는 상황이 됐는데, 안타깝단 생각이 든다"고 덧붙였다.
다만 그도 사외이사 재직시절 현실의 벽을 넘지 못했단 평가는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 2020년 신한금융지주가 실시한 약 1조1500억원 규모의 제3자배정 유상증자 건이다. 홍콩계 사모펀드를 대상으로 실시한 이 유증과 관련해선 이유와 방법이 석연치 않다는 지적이 많았지만 안건은 이사회의 벽을 어렵지 않게 넘어섰다.
당시 이사회에선 이 의장과 함께 활동하던 변양호 사외이사(전 재정경제부 경제정책국장)만이 반대의견을 개진했다. 이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당시 이 사외이사(이 의장)마저 별다른 문제제기 없이 찬성할 줄은 몰랐다”고 전했다. 이밖에도 사외이사로서 ‘라임 사태’ 등 금융사고를 견제 또는 감시하지 못했단 지적도 있다. 의결권 자문사들이 이 의장의 선임안에 반대를 권고한 이유다.
이와 관련해선 현실의 벽이 높았단 평가도 있다. 금융권 한 고위관계자는 “이 의장의 품성이나 자질 문제가 아니라, 현실에서 국내 사외이사 제도가 가진 한계라고 봐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사외이사가 회사의 내밀한 정보에 대한 접근을 보장받지 못하고, 고액연봉을 받는 파트잡(part-job)으로 취급받는 상황에선 한계가 뚜렷한 게 사실인 만큼 제도개선이 우선“이라고 밝혔다.
유제훈 기자 kalamal@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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