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당 창당시 '선전부장'제안, 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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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동은 군사쿠데타의 거대한 태풍권에서 양심적 지식인의 한계를 절감하여 우리 역사의 비운에 안타까워 했다.
집권세력은 포고령으로 모든 정당을 해체하고 정치활동을 중지시킨 상태에서 비밀리에 공화당(본명은 민주공화당) 창당작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때 공화당 선전부장 자리를 맡았으면 그의 역량으로 보아 국회의원·장차관·국영기업체 이사장 등을 지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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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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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6 쿠데타 당시 시청 앞에 모습을 드러낸 박정희 소장. 오른쪽에 소령 이낙선과 대위 차지철, 왼쪽에 소령 박종규가 보인다. 5.16 쿠데타 당시 시청 앞에 모습을 드러낸 박정희 소장. 오른쪽에 소령 이낙선과 대위 차지철, 왼쪽에 소령 박종규가 보인다. |
김자동은 군사쿠데타의 거대한 태풍권에서 양심적 지식인의 한계를 절감하여 우리 역사의 비운에 안타까워 했다. '태풍'은 지나가지 않고 자리잡았다. 3권을 장악한 그들은 국정의 요직에 군인장교들을 배치하였다. 핵심에는 육사8기생들이었다. 62년 뒤 윤석열 정권에서 검사(와 검사출신)들이 권력의 핵심을 차지한 전례라고 할까.
박정희 집단은 전문직이나 기술직 부처에는 민간인을 징발하였다. 동물적인 후각을 가진 언론인들이 추파를 보내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았다. 김자동과도 가까운 사이였던 비판적 지식인 리영희는 이를 두고 "박정희 시대의 언론과 권력관계를 두고 말하면 차라리 신문 사주와 신문인이 권력에 몸을 팔았다고 생각한다. '강간'을 당했다기 보다는 '화간(和姦)'을 한 것이다."(임헌영과 대담집 <대화>)
<민족일보>를 떠나 다시 실직자가 되어 한가를 누리고 있을 때 외신기자 시절부터 가까이 지낸 친구 서인석(<뉴욕타임스)> 특파원, 국무총리 비서실장 역임)으로부터 한 가지 제안을 받았다. 그는 이미 공화당 사조직 업무에 참여하고 있었다. 집권세력은 포고령으로 모든 정당을 해체하고 정치활동을 중지시킨 상태에서 비밀리에 공화당(본명은 민주공화당) 창당작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서인석은 내게도 같이 일하자고 제안했으나 나는 거절했다. 가장 큰 이유는 박정희가 조용수, 최백근(사회당 조직부장) 같은 사람을 사형시킨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어서였다. 자기들이 권력을 잡기 위해 탄압한 것 까지는 몰라도 죄 없는 사람을 죽인 것은 절대로 묵과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한 10년 정도가 지나 우연히 술자리에서 서인석과 어울리게 됐다. 나는 그에게 넌지시 옛일을 물어보았다.
"그때 내가 공화당에 간다고 했으면 뭔 자리를 줄려고 했는데?"
"선전부장!"
JP측에서 자기한테 선전부장을 맡아달라고 했는데 서인석은 그 자리에 나를 추천하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공화당 사전조직 단계에서부터 참여해 선전부장을 맡았다면 공화당 공천을 받는 것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집권당은 당(黨)·정(政)이 한 몸이니 문화공보부(현 문화관광부) 장관 한두 번은 그저 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나는 두 말 않고 사양하였다. 내 신념상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주석 5)
언론인 중에는 '화간'을 택한 기레기가 있고, 굴러온 떡을 물리치는 참언론인도 있다. 그때 공화당 선전부장 자리를 맡았으면 그의 역량으로 보아 국회의원·장차관·국영기업체 이사장 등을 지냈을 터이다. 그랬으면 딸과 사위가 노조위원장을 맡아 옥고를 치루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에는 어머니들처럼 자식을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김자동 어머니도 다르지 않았다.
5.16 직후 언론인 다수가 박 정권의 초빙으로 정계에 투신하여 출세가도를 달릴 때 아들 자동이에게도 그런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자동이 스스로가 거절했다. 아마 아들이 거절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나서서 말렸을 것이다.
자동이가 이승만 정권 당시 경무대 출입기자로 일할 때, 우남 면전에서 직접 회견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으나 자동이는 결코 집안 이야기를 비치지 않았다 한다. 그런 아들의 성품은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5.16 직후의 이른바 그 출세의 기회라는 것은 아들 자동이에게나, 실질적으로 그가 가장으로 있는 우리 집안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셈이었다.
고지식하달까, 강직하달까 좀처럼 남에게 머리를 수그리지 않고 타협할 줄 모르는 아들의 기질 탓인지, 자동이가 언론계 일선에서 물러난 후 손을 대었던 소규모의 여러 사업은 모두가 신통치가 않았고, 우리 집은 셋방살이나마 다행으로 여기고 살아야 했다. (주석 6)
주석
5> 앞의 책, 395쪽.
6> 정정화, 앞의 책, 316~3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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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상식인 김자동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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