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책으로만 보지 마세요, 영화와 해설도 꼭 보세요
[문광용 기자]
'나는 검둥이가 아니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다.
현재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끌고 간다.
우리가 '곧' 역사다.
아닌 척한다면, 그냥 범죄자가 될 뿐이다.
나는 선언한다.
세계는 하얗지 않다.
하얀 적도 없고
하얗게 될 수도 없다.
흰색은 권력의 메타포로
그저 체이스 맨해튼 은행의 상징색일 뿐이다.'
- 라울 펙 감독의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 2016> 1시간 26분 18초의 장면 중에서.
- 제임스 볼드윈/라울 펙 지음, 김희숙 번역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 2023, 도서출판 모던아카이브> p.149.
라울 펙 감독의 다큐영화인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를 보고 있다보면 나의 중학생 시절이 문득 생각난다. 당시 한국일보 기자였던 김훈 작가의 기사는 종종 너무 문학적이고 시적이어서 사회현실을 묘사한 것인지 아닌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이 다큐 또한 그렇다.
▲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 중 한 장면 |
ⓒ 와이드 릴리즈㈜ |
제임스 볼드윈은 <조반니의 방>, <빌 스트리트가 말할 수 있다면> 등으로 대단하고 유명한 작가이지만 흑인이자 동성애자로 미국사회에서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던 입장에서 파리로의 정착은 망명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도로시 카운츠라는 여학생이 백인이 중심이던 학교에 등교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뉴스로 보면서 인종차별의 개선을 위해 모든 걸 감수하는 각오를 지니고 미국으로 귀국한다.
메드가 에버스, 맬컴 엑스, 마틴 루서 킹이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한 미국사회의 흑인민권운동은 여러 변화를 맞게 된다. 문제는 이들이 방식의 과격성, 온건성이나 노선과는 별개로 모두 암살의 비극을 맞이했다는 점이다. 이런 여러 크고 작은 사건들을 겪으면서 제임스 볼드윈은 작가로서 사회적 명망가로서 지식인의 활동을 이어 간다.
그가 남긴 메모인 <이 가문을 기억하라 Remember this House>는 이 세 인권운동가의 삶을 포착하고 투영해보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30페이지의 이 메모는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질 뻔 했다. 그의 동생인 글로리아와 라울 펙 감독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말이다.
라울 펙 감독의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는 흑인 민권운동이 한창이던 시절의 당시 미국사회와 문화의 여러 측면들을 제임스 볼드윈의 글과 말로, 배우인 사무엘 잭슨의 내레이션으로 다시 살아난다.
이는 라울 펙 감독의 볼드윈 관련 자료를 재구성한 열정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볼드윈의 공동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만약 볼드윈이 살아 있었더라면 펙 감독의 다큐에 지지를 보냈을 것이다.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는 단순한 사회고발성 다큐가 아니다.
이것은 원주민이었던 북미 인디언을 학살하고 몰아냈던, 흑인들을 노예삼아 미국 건국의 기초를 이루었던 역사에 대한 성찰이자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인종차별에 대한 문화사회학적인 시선의 명작이다. 앞에서도 얘기했던 것처럼 제임스 볼드윈의 말과 글이 보여주는 시적 아포리즘은 너무나도 함축적이어서 다큐의 수준을 한참이나 높여준다.
▲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 도서표지 |
ⓒ 모던아카이브 |
러시아문학 전문가이자 번역가인 김희숙 작가는 흥미롭게도 영어권인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라는 각본집의 번역을 통해 이 다큐를 생생히 다시 살려내는데 성공했다. 김희숙 작가의 능력은 러시아와 체코, 영어의 언어와 번역능력, 유튜브채널 북클럽비바를 통한 해설과 아나운서 능력, 소설과 글을 통한 문화예술적인 능력만으론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
내가 바라보는 김 작가의 진짜 능력은 어느 작품이든 그 작품을 지금, 여기에서의 우리 사회에 필요한 이유와 근거로서 제시하고 풀어놓는다. 김 작가의 작품을 바라보는 맥락적인 시선은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통찰의 시선과 별개가 아니다.
이전 번역작품인 카렐 차페크의 <로봇>, 마날 알샤리프의 <위민 투 드라이브>, 안톤 체호프의 <롯실드의 바이올린>도 수려한 번역이었을 뿐 아니라 그 번역작품 각각에 담긴 김희숙 작가의 해설은 원작 이상으로 이해와 깊이의 즐거움을 준다.
이런 넓은 시선의 문화사회적인 맥락과 지금 여기에서의 연결성을 보여주는 작가의 능력은 드물 뿐만 아니라 이런 능력을 지니지 못한 다른 지식인들에게도 요구되는 값진 덕목일 것이다.
라울 펙이라는 아이티 출신의 흑인감독이 미국 최고작가의 한 명인 제임스 볼드윈의 시선을 통해 인종차별의 과거와 현재를 얘기한 다큐를 남기고 이 각본집이 다시 한국에서 번역되는 사건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GNP총량이 커지는 만큼 다문화가정, 노동자를 비롯한 외국인들의 유입, 이민과 난민 등의 문제에서도 한국은 자유롭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가치를 갱신하고 재구성해야 하는 책임과 의무의 위치에 서 있기 때문이다.
라울 펙 감독의 다큐와 김희숙 번역가의 각본집과 그녀가 멋지게 해설해 준 북클럽비바 채널의 유튜브 영상을 같이 보게 된다면 이 '트리플 3종세트'가 서로에게 연결되는 멋진 지점을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개인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것 같아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 다큐, 책, 영상 등은 각기 다른 장르같아도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공공 선(Common Good)을 위한 연대로서의 가치를 아는 이들이라면 이런 연결성은 값지고 귀하다. 이 연결성의 일부로서 참여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영화:
https://naver.me/F0Kg7KGL
각본집:
http://aladin.kr/p/VQIsc
유튜브 해설:
https://www.youtube.com/live/yfoQx0_V_Dw?feature=sh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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