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 교실 안 작은 문방구를 만들었습니다, 왜냐면요
[이준수 기자]
나는 낭비를 싫어하는 사람이지만, 적어도 학교에서만큼은 넉넉한 마음가짐을 챙기려 한다. 언제라도 나눠줄 수 있게 연필과 공책을 충분히 갖춘다. 지우개 등 학용품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챙겨둔다. 학습 보상으로 주는 간식도 빠질 수 없어서 마트에서 맛있는 과자가 눈에 띄면 사비로 사서 쟁여 놓는다. 겨울잠을 대비하는 꼼꼼한 곰처럼.
그 결과 내가 교사로 일하는 우리 반 수납장은 작은 문방구에 가까운 모습이 된다. 주인은 없다. 굳이 분류하면 학습 준비물 예산으로 산 물건이 80%이므로, 공공재라고도 할 수 있다. 학습준비물 예산이 부족하면 학급운영비나 사비로 채워 넣는다. 어쨌든 담임교사인 내가 관리자이고 학생이 손님이다.
우리 반 손님들, 즉 학생들은 돈을 내지 않는다. 수업 물품은 물론, 쉬는 시간에 종이 거북이를 접는다고 하더라도 편안하게 색종이를 가져다 쓸 수 있다. 학급 유리창에는 글라스 데코로 만든 '딸기 케이크'와 '오코노미야키'가 붙어있다. 미술 시간에 쓰고 남은 재료로 만든 작품이다.
▲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교실의 작은 문방구 |
ⓒ 이준수 |
내가 국민학교(현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에는 사소한 준비물까지 문방구에서 직접 돈을 내고 사가야 했다. 큰돈이 들지는 않았지만, 매번 준비물을 점검하기란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다. 장사를 하셨던 부모님이 정신없이 바빠서 알림장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날에는 빈손으로 학교에 갔다. 부모님이 바쁘면 내가 챙기는 것이 옳은 대처였으나, 나는 때때로 '펑크'를 내는 학생이었다. 그럴 때마다 당연히 선생님께 꾸중을 들었고, 친구 물건을 빌려 써야 했다.
언젠가 친구들이 한 덩이씩 보태준 찰흙을 뭉쳐 제법 굵직한 덩어리를 만든 기억이 난다. 미묘하게 색과 질감이 다른 갈색 점토를 하나로 짓이기며 나는 친구들에게 고마움과 민망함을 동시에 느꼈다. 순순히 찰흙을 떼주는 착한 친구도 있었지만, 큰 소리로 핀잔을 주는 녀석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마음이 무거운데 기분 나쁜 소리까지 들으니 자존심이 구겨졌다. 그러나 준비물을 챙겨 오지 않은 책임은 내게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 당시 나는 자신의 부주의함을 탓할 뿐, 학교에서 준비물을 제공할 수 있다는 발상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지금은 무상의무교육의 원칙에 따라 학습비는 물론, 급식, 우유(내가 소속된 작은 학교는 무상), 준비물까지 아이들에게 공짜로 제공한다. 교문을 통과해 학교에 있는 순간만큼은 복잡한 집안의 경제 사정을 잊고 누구나 동일한 조건에서 수업받을 수 있다.
내가 흐뭇한 표정으로 교실 문방구 이야기를 꺼내면, '학생이 마구 물자를 낭비해서 교실이 엉망이 되면 어떡하냐'고 걱정부터 하는 분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일은 좀처럼 발생하지 않는다. 물자가 풍부한 시대의 아이들은 개인 물건을 충분히 가지고 다니며, 학교 물품을 쓸 때는 상식선에서 적당히 사용한다. 공용물품을 썼으니 뒷정리 정도는 해줘야 한다고 일러주면, 청소까지 알아서 깔끔히 끝낸다.
▲ 반토막 난 분필과 넉넉한 분필상자 |
ⓒ 이준수 |
물론 가끔은 교실 문방구를 편하게 쓰다 보면 사소한 해프닝도 발생한다. 액체 괴물 슬라임을 만든답시고 온갖 물질을 섞다가 책상이 끈적해지는 일도 있고, 바닥에 흐른 물풀을 닦겠다며 대청소를 감행하는 바람에 오히려 바닥이 물로 흥건해지는 경우도 있다. 오늘은 점심을 먹고 왔더니 내 책상 위에 이런 접착식 메모지 한 장이 붙어 있었다.
'쌤, 죄송해요 ㅠㅠ'
메모지를 위로 들춰보니 그 아래로 반토막 난 새하얀 분필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침에 새로 꺼낸 분필이었다. 정확한 경위는 알 수 없지만, 누군가 실수로 떨어뜨렸거나 해서 반토막이 났으리라. 그냥 말로 해도 되는데 굳이 쪽지까지 남긴 정성에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수업 시간이 시작되자 D가 자못 긴장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나는 대번에 쪽지를 쓴 주인공을 알아챌 수 있었다. 내가 살짝 눈길을 주자 D는 움찔거리더니 손을 들었다.
"쌤, 제가 그랬어요. 색연필 올려놓으려다가 그만..."
그렇게 큰일도 아닌데 너무 미안해하길래 나는 대답 대신 분필 상자를 꺼내 보여주었다.
"선생님이 이럴 줄 알고 72개짜리 세트로 잔뜩 사놨어. 분필은 어차피 소모품이잖아. 부서지는 것까지 다 계산했다고. 후후후."
D는 그제야 활짝 웃으면서 "아, 그래요?"라고 큰 숨을 내쉬었다. 물자를 아껴서 이면지까지 알뜰하게 사용하는 것은 건전한 생활 태도다. 그와 마찬가지로 공부하는 데 필요한 물품을 눈치 보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환경도 꼭 필요하다.
나는 어릴 때 담임선생님이 정답이 파란 글씨로 인쇄된 교사용 문제집을 칭찬 선물로 주시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이제는 우리 반 아이들에게 정식 예산으로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수준의 학생용 문제집을 원하는 만큼 사줄 수 있다. 나머지 공부를 하게 되면 간식비도 청구할 수 있다. 전교생이 서른 명이 되지 않는 우리 학교는 방과 후 교실, 수학 여행비도 모두 무료다.
▲ 놀이터의 아이들 |
ⓒ Jess Joerb,Unsplah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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