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 초청해놓곤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정현권의 감성골프]

2023. 3. 31.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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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만났는데 왜 속도가 느려요? 평소 술 좋아하시면서 너무 몸 사리는데요. 무슨 일 있으세요?”

모임에서 고교 동창이 술잔을 앞에 두고 제사 지내는 내 모습에 제동을 걸었다. 다음 날 새벽 골프가 있다며 이실직고했다.

퇴직한 동문들도 있어 평소 같으면 제법 술판이 벌어지는 자리였다. 새벽에 차를 몰아야 한다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양해를 구했다.

골프 전날 저녁 약속이 잡히면 난감하다. 골프 애호가들은 이런 날 저녁 약속을 대부분 피한다. 일단 새벽 운전이 걸림돌이다.

몇 년 전이다. 충북 진천 인근 골프장에서 아침 일찍 골프가 예정돼 있었다. 새벽 5시께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순간 한 동반자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전날 도저히 피하지 못하는 저녁 자리가 새벽까지 이어져 자신을 빼달라고 양해를 구했다. 당일 새벽에 골프를 취소하다니 순간 놀랐다.

처음 가볍게 시작한 저녁 자리가 중요한 외부 인사와 우연히 마주치면서 길어졌다고 한다. 결국 업무상 질펀한 술자리로 변질돼 새벽까지 달리고 말았다.

새벽에 퇴근한 남편이 바로 골프백과 키를 챙겨 집을 나서려는데 아내가 기필코 말린다고 했다. 그 상태로 운전하면 큰일 난다며 극구 저지했다.

아예 골프장에 나타나지 않는 사례도 있다. 친한 대기업 중역이 축하받을 일이 있다며 지인들을 초청했다. 수도권 명문 골프장이었다.

티오프 직전에도 나타나지 않아 세 번이나 전화를 했다. 신호음은 가기에 바쁘게 운전 중일 거라는 생각에 더 이상 전화하지 않았다.

전반 도중에 몇 번이나 전화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동반자들이 골프 비용을 더치페이 하기로 약속하고 진행을 이어갔다. 속상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혹시라도 사고를 당하지 않았는지 모두 걱정했다.

후반 4홀 정도 지나 전화가 왔다. 도저히 합류하기 어렵고 끝날 무렵 골프장에 도착해 비용 계산을 하겠다며 모기 목소리로 말했다.

클럽 하우스로 돌아오니 그가 이미 계산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전날 동료와 가볍게 저녁 자리를 했는데 갑자기 상관이 분위기를 띄우면서 술판이 크게 벌어졌다는 것.

처음에는 몸을 사렸지만 상관에게 핀잔을 받고서는 무한 질주를 했다고 해명했다. 직장에 메인 몸이라 정말 죄송하다며 다시 날을 잡았다.

골프 전날 불가피하게 저녁 모임이 잡히는 순간 머리가 복잡해진다. 그렇다고 본인 사정만 고려해서 저녁이나 골프 약속을 잡지 못한다.

전날 과음에도 불구하고 아침 일찍 운전하면 정말 위험하다. 음주 측정에 바로 걸리고 무엇보다 사고가 우려된다. 멘털이 흐트러져 공도 잘 맞지 않는다.

필자도 골프 전날 저녁 약속은 가능한 피한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불가피한 자리라면 절제한다. 주종에 따라 소주 3잔, 맥주 2잔, 와인 1잔을 넘기지 않는다.

2~3달 후 많았던 달력 빈칸이 갈수록 빼곡한 일정으로 채워진다. 골프와 저녁 약속이 계속 늘어난다.

일주일에 저녁 2번에 골프 2~3번 정도로 늘어나면 이제는 골치가 아파진다. 30대나 40대가 아니면 체력적으로 견디기 힘들고 60대 이상에는 아예 고역이다.

“여건이 된다면 골프는 일주일에 한 번 저녁 자리도 한 번 정도로 조합하고 골프 전날 저녁 자리는 가능하면 피하는 게 좋아요.”

오재근 한국체대 운동건강관리학과 교수는 골프는 멘털에 특히 좌우되는 종목이라 맑은 정신으로 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녁에 기분을 내는 만큼 다음 날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

프로 골프 선수들도 술을 무척 조심한다. 대회 며칠 전부터 술을 자제한다. 신체 리듬과 멘털에 문제가 생길까봐서다.

존 댈리(57)는 PGA 투어 처음으로 300야드 장타 시대를 열었지만 과음으로 골프 수명을 단축시켰다. 술로 일세를 풍미한 그는 마스터스가 열리는 오거스타에서 판을 깔고 자기 이름으로 용품을 팔기도 했다. 술과 세월에 장사가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줬다.

“술은 소뇌의 조절·균형 기능을 저하시켜 집중력과 판단력을 흐리게합니다. 특히 드라이브샷의 방향성과 퍼트 집중력에 지장을 초래하죠.”

오재근 교수의 말이다. 18홀을 돌고 샤워 후 시원한 맥주 한 잔은 감로수다. 해방감을 만끽하는 데는 술이 최고의 묘약이다.

와인 가운데 1865라는 브랜드가 있다. 18홀에 65타라는 의미로 골퍼들 사이에 인기가 좋다. 골프 후에 마시거나 상품으로 사용된다. 원래 이 숫자는 칠레 와인 생산 업체인 산 페드로의 설립연도다.

골프와 술은 일란성 쌍둥이다. 우선 최적의 멤버가 4명이다. 둘 다 5시간 정도 지나면 인격이 드러난다. 얼굴은 거울에 비치고 인격은 술과 매너에 비친다.

“남자가 첫 잔을 들 때와 여자가 마지막 잔을 들 때는 그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O 헨리)

정현권 골프칼럼니트스/전 매일경제 스포츠레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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